아브라함: 부자행전.父子行傳(창 22.1-24)

20200201(양무리)

  

 

 

아브라함: 부자행(父子行傳)

Gen. 22.1-24

  

   본문 관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1)  

   데리고 가라!(2)

   모리아 땅으로 가라!(2)

   번제로 드리라(2)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3)

   제삼일에(4)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6)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7)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9)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

   언약의 계속적인 반복(확대, 15-18)

 

      [구조]

      하나님의 말씀(1-2)

      아브라함의 순종(3-10)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1(11-12)

      아브라함의 순종(13-14)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2(15-18)

      브엘세바로 돌아옴(19)

   

 

모리아산으로 가는 길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게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2)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3)

   제삼일에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4)

   저기 가서(5)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9)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14)

 

아브라함은 이제 늙어 기력이 쇄한 나이였다.

그리고 이삭은 자신을 번제로 드릴 때 쓸 번제목(燔祭木)을 지고 모리아산으로 오를 정도로 장성해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번제를 위한 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 아들 이삭은 충분히 아버지의 힘을 능가하는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순순히 결박당한다. 한편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21.33b)에서처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바로 그때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다. 인생이 맞은 행복, 그것이 과연 계속해서 어느 쪽으로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은 옳다.

실로 오랜만에 찾아 온 행복한 나날이었다. 이제 인생 말년에 상속자 아들 이삭까지 얻었으니 그 얼마나 기쁘고 복된 생활이었겠는가. 무럭무럭 자라가는 이삭을 보면서, 또한 그 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씩 눈으로 보며 맛보는 것이 아마 가장 큰 낙이었음직 하다. 그러나 이야기는 급반전되고 만다. 하나님은 이제껏 이와 비슷한 암시마저 하신 적이 없었다. 오직 이삭을 통해 이루어 가실 찬란한 소망과 영광된 내일의 은총만을 말씀하셨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15.6). 마침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지 25년만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하나님은 마냥 행복해 하는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찾아오셔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것을 명령하셨다.

   

 

순종1: 아브라함

 

   “너희에게로 우리가 돌아오리라.”(5, 원문)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

 

그 역시 인간인지라 고민(생각)했을 것이다(5,8). 얼마나 혼돈스러웠을까. 이것이 꿈이기를,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을 법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고, 이 명령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런 절대 명령이었다. 여기에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3a) 즉각적으로 순종한다. 하나님은 만물이 고요에 잠긴 밤에 그에게 찾아오셨고,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한다.

3일 동안 모리아산을 오르던 아브라함을 생각해 본다(4). 즐거워 콧노래를 부르며 아름다운 경치를 관광하던 기분은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그 반대다. 모리아산에 가까이 이를수록 아들의 죽음이 임박하게 된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아니 걸어가고 있는 아브라함을 보라. 그는 자신의 시련(시험, 환란, 고통)을 알면서 그것 앞에 서 있었다. 이것은 시험인지조차도 모르고 지나치는 사건, 그리고 갑자기 만나는 사건과 다른 것이다.

그는 노중(路中)에 종종 찾아오는 이런저런 갈등을 물리쳤을 것이다: “돌아갈까? 도대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차라리 내 목숨을 원하셨다면 내 기꺼이 드렸을 것인데, 암담하구나! 만약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몇 일을 더 기다릴 것을 너무 빨리 온 건 아닐까. 몇 일 더 기다리다가 불호령이 떨어지면 그때 슬슬 출발하는 건데. 내 발걸음이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좀 더 천천히 걷자! 나귀의 다리나 부러질 일이지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 이게 꿈이었으면 좋을 걸! 하나님이 분명 엘리에셀도 아니요 이스마엘도 아니라 하셨고, 마침내 약속의 후사인 아들 이삭을 주셨는데 듣도 보도 못한 인간 제물(제사)’을 명하시다니 어 말세(末世)로다!’ 늙으면 죽어야지, 이게 내가 인생 말년에 못 볼 꼴을 보는구나! 아들 없이 혼자 사라를 볼 면목이 없구나. 이후로 아내의 마음을 무엇으로 위로할까.”

하지만 아브라함의 결단, 바로 그 믿음을 보게 된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10) 이 일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증거가 생각난다(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랬다. 아브라함에게는 이 보석과 같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삭이 죽음 앞에서도 잠잠함으로 순종하며 결박당하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미 자신 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분명한 영적 권위가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아브라함의 가정처럼 이런 믿음의 결단은 고사하고, 자녀들만큼도 영적으로 설복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끌려 다니는 것과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영적 권위가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 현대 가정들이 흔들리는 것은 아브라함이 없기 때문이요, 또한 이삭과 같은 자녀가 양육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종2: 이 삭

 

이삭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소위 자신의 출생 비밀을 부모들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또래들과 비교되지 않는 부모들의 나이에서, 이웃 사람들의 이런저런 말들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부모들의 신앙에서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자신 또한 감히 반항할 수 없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삭은 영적으로 매우 건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자주 목격했을 것이다. 그런데 평소와는 좀 다른 제사 준비였다. 제사장인 아버지, 그리고 번제에 쓸 나무와 불과 칼은 준비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제물이 없다는 이삭의 통찰은 매우 깊은 것이었고 정확한 것이었다(7b).

이삭은 아마도 철이 들면서부터 제사가 끝나면 아버지에게 물었을 것이다. 왜 죄 없고, 순하고, 예쁜 어린양이 죽어야 하느냐고. 때로 기쁨과 감사의 제사, 때론 회개와 속죄의 제사, 그때마다 이삭은 아버지로부터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에 대해서 배웠다. 아마 매우 어렸을 때에는 예쁘고 귀여운 어린양이 죽는 것을 보고서 남몰래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어린양의 대속을 통해 이삭은 점점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삭 자신이 결박당하였다(9b). 이삭은 번제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을 오를 정도로 장성해 있었다. 반면에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어서 기력이 쇄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순순히 아버지에게 결박당하는 이삭 말이다. 이삭은 하나님을 믿었고, 아버지를 신뢰했다. 거역할 수 없는 영적 권위가 아버지에게 있었지만, 이삭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 이제야 어린양을 갖지 않고 머나먼 3일 길을 걸어오면서 이따금씩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버지 아브라함을 기억하면서 그 깊은 고뇌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단 위에 제물로 결박되어 산 제물이 되어 있는 이삭을 생각해 본다. 이들 부자(父子)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었다. 이것이 말이 아닌 행동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만이 최고의 가치가 있으며, 이를 순종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이들 부자(父子)는 알고 있었다.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나도 이런 가정을 꿈꾼다.

   

 

하나님의 축복

 

   “내가 이제야 네가 ”(12b)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16a)

 

하나님은 마침내 이 순간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미리 다 아셨지만 이삭을 잡으려는 그 시간까지 참으셨다.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이 이루어지는 때까지 모리아산의 제사에 개입하시지 않으셨다. 생각해 보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아실텐데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것을 보신다는 것이 하나님 자신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미 이 제사의 결과를 아신 하나님께서 왜 이를 명하셨으며, 또한 이삭이 제물로 잡히는 순간까지 보시고 계셨어야 할까?

3일 전 집을 나설 때, 혹은 모리아산을 오를 때, 아니면 이삭을 결박하려고 할 때, 그때 나타나셔서 됐다, 아브라함! 내가 다 안다. 너의 중심을 말이다. 굳이 꼭 아들 상처받게 그를 결박할 필요 없다.”라고 말씀하셨어도 될텐데 왜 이처럼 피를 말리는 순간까지 인내하실까. 너무 잔인하지 않으신가. 하나님이 좀 심심하셨을까. 아브라함과 이삭을 주연 배우로 세워 놓고, 모리아산을 무대로 삼고, 하나님 자신이 감독이 되어, 창세기의 독자를 관객으로 하여 아낌없이 주련다!”라는 제목의 연극을 연출하신 것일까?

그러나 하나님이 전능하셔서 다 아시기에 굳이 모리아산에서 이런 실화를 찍을 필요도 없었다면 아브라함이 받을 복도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구체적인 행위()로부터오기 때문이다. 이점이 내 인생에서도 구원 그 이후에 있어야 할 행함(행위, 생활)이 차지하는 가치이다. 하나님이 이 양자를 모두 다 알아서 소위 하나님 마음대로!” 하신다면 인간은 로버트(자동 인형)에 불과하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을 축복하실 때 하나의 공식처럼 분명하게 드려내 주신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축복하시기 전에 반드시 시험이라고 하는 뺄셈부터 하신다는 점이다. 무엇인가 잘 되고, 막 쌓이고, 무엇을 하든지 다 곱해지고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훨씬 그 반대였다. 시험을 받고, 문제가 막 터지고, 재산이 날아가고(탕자, , 베드로), 자녀들이 다 죽고(), 목숨이 달랑달랑 하게 되고(사자굴의 다니엘, 에스더), 몸이 으스러지고(얍복강의 야곱, 스데반), 노예와 죄수가 되고(요셉, 사도 요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골리앗 앞에 서게 되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 이처럼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게 되는 뺄셈이 쉼없이 진행된다.

이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나님이 없다. 나 교회 방학할 것이다. 십일조 보이콧이다. 교회를 옮기자. 목사 바꿔라. 나는 다리 밑에서 주어 온 자식인가 봐. 이제 좀 편안히 믿자. 종교를 바꾸자. ○○ 때문에 시험 받아서 도저히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없다. .” 이렇게 되면 이미 영적 전투에서 밀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만나는 모든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는 우연이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드디어 내 인생에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사건을 일으키시는구나! 이제 내가 믿음으로 이 뺄셈을 잘 통과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 그려지겠구나!” 그래 가슴이 막 뛰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 통찰(spiritual insight)이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눈물 흘리고 있다면, 바로 그것만큼 내가 믿음 없다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마침내 나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시험’(test)하시는데도 그 영적 통찰을 하지 못하고 시들시들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향한 불충이며, 불신앙이다.

나는 지금 문제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다른 아무 것으로도 지금 당면한 시련을 이겨낼 수 없다. 오직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서는 길 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하나님이 스스로 맹세하셨다(16a). 이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놀라운 축복을 바꿀 수 없다는 가장 확고한 선포인 셈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복()이다. 마침내 기나긴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바울에게도 동일한 영적 통찰이 있었다(8.28,30,38-3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부스러기 묵상

 

   갈대아 우르(11.28,31, 15.7, 9.7): 아브라함의 고향

      출생(11.27, *이하 모든 성경구절은 창세기임)

      부르심1(7.2-3)

   하란(11.31, 12.4,5)

      부르심2 가라!(12.1-3, 75)

   가나안(12.5)

      단을 쌓고(12.7b, 13.18)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니(12.8b, 13.4)

         → 기근(12.10)

         → 죽음의 공포(12.12)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니(13.4)

      단을 쌓고(13.18)

         → 무자(無子, 15.2)

           → 이신칭의(15.6)

             → 400년 후의 약속 가나안(15.12- )

               → 이스마엘 출생(16.5-16, 86)

                 → 언약과 할례(17.1- , 99)

                   → 아들 약속(18.9- )

                     → 하나님께 기도(20.17)

                       → 득남(得男, 21.1- , 100)

                         → 이스마엘로 인한 근심(21.11)

                           →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21.33-34)

                             → 아들 이삭을 바침(22.1- )

                               → 죽음(25.7-11, 175)

 

아브라함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클라이맥스(climax)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마침내 믿음의 정상에 섰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서, 자신의 인생으로 하여금 이처럼 승리자요 복된 자임을 확증해 준 모리아산, 그리하여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 선언하며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의 첫 페이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따르는 모든 믿음의 후예들에게도 역시 매우 중요한 영적인 진리를 전해 준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22장에서 이삭을 바친 행위를 보시고, 그리하여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15:6절은 22장 보다 우선한다. 또한 17장의 할례의 행위언약 보다 이신칭의(以信稱義, 15.6)의 선언이 먼저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창세기의 구조다: 이신칭의(은혜언약, 15) 할례(행위언약, 17) 아들 이삭을 드림(확증, 22)

이렇듯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 때문에 의롭다는 칭의, 다시 말하면 행위가 믿음을 발생시키거나 만들지는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내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선포한다. 구원과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이렇다. 믿음은 행위로 말미암아 입증된다(7.16-20).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말씀대로 산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한 행위와 구원 이후의 행위를 혼돈하지 말아야 신앙이 한 차원 성숙하게 된다.

바울의 로마서를 보라. 로마서는 전반부(1-11, 이신칭의)와 후반부(12-16, 행함)로 되어 있다. 이 두 부분이 바뀌어 있지 않다. 후반부처럼 살아야 전반부의 은혜를 받게 된다고 되어 있지 않다. 아브라함의 일생도 그러하며 나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있어서 이 진리를 바꿀 사람은 없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 진리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한편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가. 가장 소중한 것을 요청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과 이삭 가운데 양자택일(兩者擇一)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종종 나와의 관계도 이처럼 맺고 싶어하신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확증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또한 당신의 나를 향한 사랑을 이처럼 확인하시고 싶어하신다. 따라서 가장 귀한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 본 신앙 경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고, 그분이 가지고 있는 나를 향한 가장 깊은 사랑과 애정을 이해할 수 없다.

종종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교제, 사귐)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영적 성장과 성숙이 멈춘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게는 영적 자유함이 없다. 따라서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불안과 하나님을 향한 죄송함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 공사이다. 결국 공사가 끝난 이후의 평강을 맛보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며 사는 사람은 언제나 신나고, 기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 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미 그는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나님께 믿음으로 공증(公證)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잠시 하나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로 살아간다. 이 얼마나 멋진 삶인가. 그러니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나에게도 이러한 행복한 삶을 약속하고 계신다.

한편 본문(1-19)은 아브라함의 일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이 이야기가 성경에 모형론(typology)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발견되지 않고 있음이 흥미롭다. 그러나 ’(후손)에 대한 약속은 점차 발전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이 둘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것에 대한 응답(순종) 사이에 벌어진다.

특별히 예배를 위한 한 특별한 장소의 강조가 눈에 띈다(2,3,4,5,9,14). 재미난 것은 역대기에 솔로몬성전이 지어진 곳으로 나타나기까지 모리아는 일단 침묵한다(대하3.1). 한편 여호와의 산’(14)과 관련하여 원어적인 의미는 여호와의 산에서 나타내실(보이실) 것이다.”는 뜻인데 하나님은 훗날 바로 그 산에서 나타나사 십계명을 주시고(19), 광야교회 40년을 지나 마침내 시온산에 이르게 된다(10.33). 그리고 다시 후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다(대하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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