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기도(창 18.16-33)

20210711(양무리교회)

기도시리즈: 아브라함의 기도

기도시리즈: 이삭의 기도

  

 

기도: 아브라함의 기도

Gen. 18.16-33

 

    본문 관찰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16-21)

    심판자 vs 중보자(22-33)

 

        [구조2]

        서곡(18.1-15)

        소돔의 죄악과 아브라함의 중보기도(18.16-33)

        롯의 구원 vs 소돔의 멸망(19.1-29)

        소돔의 멸망, 그 이후: 롯의 부정적 언행(19.30-38)

 

 

중보기도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24.2b-3a)

       →

          ▪우리 조상 아브리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7.2b-4a, 11.3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람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12.1-5)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자녀와 그의 집안 자손들에게 명해

               여호와의 길을 지켜 의와 공의를 실천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19a, 우리말성경)

 

아브라함과 롯을 같이 놓고 생각해 본다.

함께 데라를 따라 갈대아 우르(Ur)을 출발해 하란을 거쳐 약속과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왔다(24.2-3 11.27-12.5; 7.1-4). 함께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또한 동시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길이 아닌 쪽으로 발을 딛었을 때 일어난 모든 일들과 결과를 지근 거리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고, 또 함께 이를 경험했었다.

한편 이 과정에서 롯 역시 양과 소와 장막이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13.5-6), 소위 아브라함목장롯목장 기업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끊이질 않았고, 이에 자꾸만 법원에 소송이 많아졌다. 그래서 급기야 기업 분할을 하기로 하고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13.14a). 이 일은 창세기 13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아브라함과 달리 롯은 여호와 앞에서 악하며 큰 죄인인 소돔까지 이르렀다.

그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을 떠나 세속도시의 사람들과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점차 동화되어 갔고, 그 결과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처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은 차이가 인생 전체를 뒤흔들고 만다. 바로 이 부분이 롯의 일생에 전환점이다. 그는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고 신앙을 배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돔(16-21)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13.10-13)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통해 주실 복을 말씀한다(16-19).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강대한 나라와 천하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될 약속을 주시면서(18),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나라에 대한 비전,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백성들이 있는 거룩한 나라에 대한 비전을 드러내신다(19). 이를 위해 아브라함은 자식과 권속, 곧 그의 집안 자손들을 잘 가르칠 책임이 있었다. 이것이 19절이라는 -이는 앞서 12장의 소명선언에는 씨앗처럼 감추어져 있다.- 놀라운 복음이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자녀와 그의 집안 자손들에게 명해 여호와의 길을 지켜 의와 공의를 실천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19a, 우리말성경)

그리고 롯이 거주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히 무거운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신다(20-21). 아브라함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각적으로 알아차렸다. 그것은 악인을 멸하시는 심판이다(23). 사실 이 두 사람이 헤어지는 장면이 기록된 창세기 13장에 의하면, 이들이 헤어지는 순간에 보여준 모습은 지금 이 심판과 중보기도로 나누어지는 그림을 예상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롯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탐욕을 좇았으나,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주하였고(13.12a), 또한 헤브론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13.18)을 정도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롯은 어떤가. 롯은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신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의를 실천하”(19a)는 거룩한 백성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죄악이 심히 무거’(20b),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바로 그곳에서 죄와 친구처럼 지내는 중이다. 이처럼 롯은 점점 은혜의 초점을 벗어나 죄와 심판의 과녁으로 변질되고 무너지고 망가져가는 중이었다. 지금 심판주가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소돔으로 이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죄와 즐겁게 놀고 있는 중이다.

   

 

심판자 vs 중보자(22-33)

 

    그 성 중에 의인 명이 있을지라도

    50명을 찾으면

    45명을 찾으면

    40명으로 말미암아

    30명을 찾으면

    20명으로 말미암아

    10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때 소돔과 심판 사이에, 롯과 하나님 사이에 아브라함의 기도가 자리한다.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매우 겸손한 태도와 자세를 따라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린다(22-33). 그는 의인의 숫자를 6번 제안하고, 이어 5번이나 줄여가면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이 부당하므로 공의로운 판결을 행하실 것을 중보한다(25): 의인을 악인과 같이 죽이고 의인을 악인처럼 대하시는 것은 주께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인 주께서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25, 우리말성경) 의인을 향해 애통해 하며 끈질기게 중보하는 아브라함에게서 우리가 맡아야 할 중보기도의 거룩한 부담과 사명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아브라함이 보인 반응은 중보기도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중 하나는 내가 의인으로 살았다면 심판이 넘어갔을 수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내가 죄인으로 살았기에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기도의 무릎을 포기하지 않는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 당함을 보며 중보기도 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이웃사랑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이유다. 하나님과 반대로 걸으면서까지 쌓아올렸던 롯목장은 이렇게 부도 처리되면서 공중분해 되고 만다. 모래 위에 세운 집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은 심판을 막기 위해 중보기도자로 서 있고(아브라함), 한 사람 롯은 심판이 집행되는 대상의 자리에 서 있는 이 기막힌 현실이 어찌 아브라함과 롯에게서만 연출되는 그림일까.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19.29)

 

롯은 아브라함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사람이다.

설명만이 아니다. 롯의 존재는 아브라함 없이는 그의 인생사 자체가 연결되거나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아브라함이고, 또한 그 누군가에게 롯이다. 나를 위해 중보기도의 무릎을 꿇은 누군가의 기도의 눈물이 흐르는 곳으로 우리네 인생행전이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잘해서 소돔에서 구원 받은 롯처럼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인생의 여정이 롯처럼 살아도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롯목장이 소돔나라에서 일류기업이 되고, 명성과 부와 권력을 다 얻어 누리는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이 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끝장나는 날이 올 수 있다. 이렇게 다 끝났고, 막다른 종점에 와 있는데,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찌 된 게 다시 생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고, 끝난 게 끝난 것이 아닌 것으로 조금씩 다시 새 싹이 나는 것, 그것은 여전히 탕자 롯처럼 사는 나를 위해 누군가가 아브라함이 되어준 기도의 무릎 때문임을 기억하자.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기도, 그 첫 번째 기도는 이처럼 누군가를 살리며 사랑하는 중보기도다. 이는 하나님과 300년 동안이나 동행하며 의롭게 살았던 에녹에게서도, 노아가 하나님의 구원(방주)과 심판(홍수) 앞에서도 행하지 않았던 놀라운 기도다.

너를 살리는 기도, 이웃을 사랑하는 기도,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구하는 기도, 죄악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기도, 심판받아 마땅한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기도가 아브라함의 기도에 들어있는 누룩과 같은 축복의 씨앗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19.29b)

 

아브라함의 기도와 그의 믿음은 롯을 살리는 통로가 된다. 어찌보면 롯목장아브라함목장의 최대 경쟁사다. 우리 시대를 보면 형제 간에도 서로 지분을 더 가지려고 싸우고, 그러다가 회사가 하루 아침에 문을 닫고, 형제와 친척 사이가 원수가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도 동종업종인 경쟁사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중보기도자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못한 일은 없다. 기도하지 않아야 할 사람도 없다. 이것이 기도를 통한 형제 사랑이고, 이웃 사랑이다. 아브라함은 점점 이러한 삶을 이루는 자로 나아가고, 반대로 롯은 이러한 삶에서 점차 멀어져 간다. 동일하게 갈데아 우르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명령과 소명을 받고 보며 달려왔으나 끝내 점차 조금씩 분명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이때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통해 그 간격을 좁히려고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의 무릎을 꿇는다. 우리의 기도가 서야 하는 자리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우리 곁에는 무수한 롯이 있다. 이제 우리도 너를 위한, 너를 향한, 너를 품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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