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위기(창 12.10-20)

20200117(묵상)

   

 

 

아브라함의 위기

Gen. 12.10-20

  

   본문 관찰

 

   A 애굽에서의 사라의 위기(12.10-20)

      B 룻과 소돔(13.1-14.24)

         C 아브라함 언약(15.1-16.16)

         C’ 아브라함 언약 갱신과 이삭의 수태고지(17.1-18.15)

      B’ 룻과 소돔(18.16-19.38)

   A’ 그랄에서의 사라의 위기(20.1-18)

   

 

애굽생활

 

가나안 애굽으로 넘어간다.

약속의 땅을 버리자 곧 아브라함(사라)에게 위기가 닥친다. 그런데 이 위기는 이중적이다. 하나는 땅의 기근을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그것은 곧바로 그렇게도 소중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는 위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기근을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생명을 잃게 되는 위기로 더 강화되는 위기, 이를 어찌할까.

장소(지명)의 이동이 주는 교훈이라는 맥락에서도 메시지가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리고 이것을 받는 사람에게 주신 약속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명령과 약속 밖으로 나갔을 때 만나는 것들 속에서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주제를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의 이동을 따라가 보면 이런 흐름은 대단히 흥미롭다.

아브라함의 이동을 추적한다(11.31-12.20).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축복의 계보의 조상이 된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그가 장소 이동을 하는 것과 그대로 만난다. 이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그 안에 중요한 영적 교훈들이 있다.

 

 

갈대아 우르(‘강 저편’, 24.3,14-15)/하란

   → 보여

      → 가나안

 

아브라함에게 있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은 무엇보다도 창세기 121절이다. 그의 이름이 드디어 성경의 핵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으로 말미암는다. 그는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는 하나님의 명령과 소명(축복)의 말씀을, 마침내 좇아갔다(4).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을 부르는 분이 하나님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1), 그리고 그는 이 명령에 순종한다.

그는 아담 에노스 에녹 므두셀라 노아 셈으로 이어지는 계보(5.1-32, 11.10-32) 속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구전(口傳)을 통해서 전해 듣고, 알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10.17). 아브라함은 바로 그 하나님의 뜻(부르심)에 순종한 것이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 즉 인도하시려고 했던 곳은 분명히 가나안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7b-8). 문제는, 그런데 그가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9). 이것은 하나의 화근이요, 불행을 품게 되는 씨앗이었다(1.15).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약속의 땅을 떠나 마음대로 이동한 것이 문제의 시발이 된다.

   

 

가나안(벧엘)

   → (점점 남방으로 가다) 애굽

 

아브라함의 일생에 있어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창세기 1210절일 것이다. 앞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는 명령을 좇아갔다. 그 땅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가나안이었다. 한편 그 땅, 즉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있다. 하나님이 보여 땅인데도 말이다. 이것이 이 땅’(약속의 땅)이 갖는 이중 구조다. 가나안은 그곳이 가나안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유토피아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스스로 언약(십자가) 밖으로, 은총 밖으로, 그리스도 밖으로 나간 것이다. 잠시 잠깐이 아니라 우거(寓居, 정착)하려고 갔다. 하지만 예전처럼(4) 말씀을 좇아 간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죽음을 염려하고(12),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거짓말을 한다(13). ,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런 것들이 애굽이 던져주는 미끼들이다.

하지만 애굽마저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래서 그의 신앙이 성장하는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하나님이 그리하신다. 이는 그의 전성기, 그러니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주저함 없이 3일 길을 올라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렸던 일은 아마도 아브라함이 치른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기근과 애굽에서 죽음을 생각했지만, 번제와 모리아산에서는 살아 그 산을 내려오게 하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11.17-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9)

놀랍지 않은가.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내딛은 불신앙과 인간적인 선택의 애굽마저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고 경험하게 하시는 것을 누린다. 이는 우리가 그래도 괜찮다거나, 그리하여도 다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되돌리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분명 애굽으로 내려간 행위는 하나님의 채찍과 꾸지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선()으로 돌리시며, 하나님 쪽으로 더 성장하고 성숙한 걸음을 내딛는 기회가 되게 하신다는 점이다.

   

 

애 굽

   → (남방으로 올라가다) 벧엘

 

자가 자신에 대해 절대절망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 앞에 결코 서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소망’(신뢰)의 부스러기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 하나님 없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하는 소위 자존심이야말로 하나님과 가장 원수 되는 죄악의 씨앗이다.

아브라함은 비싼 수업료(애굽수업)를 지불하고 이 진리를 깨닫는다. 결국 아브라함은 다시 벧엘로 귀환한다. 하나님에 대한 항복이다. 벧엘은 그가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이다(8). 그는 드디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했던 살아 있는 현장’(field)으로 복귀한다. 소위 첫 사랑을 회복한 것이다(2.4).

벧엘은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단을 쌓은 곳이다(7). 아브라함은 예배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곳이 바로 가나안이다. 그는 벧엘,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었다(8). 드디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처음에 보여 땅에서의 신앙을 그대로 회복한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부스러기 묵상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3a)

 

분명 아브라함은 가나안(‘이 땅’, 5,7)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즉각적인 위기를 낳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지키시며 그들의 편에서 일하신다(17). 왜 그러셨을까. 이는 하나님 당신 스스로가 이미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을 지키시는 은혜의 주인이심을(3a), 이런 위기의 때에도 여전히 일하시는 분이심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아브라함(사라) 뿐만 아니라 애굽왕 바로와 그의 백성들까지도 알고 들어야 하는,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3b)는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신다. 물론 아브라함/사라, 그리고 바로왕/애굽 이들 모두가 이처럼 찾아오시며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따르느냐는 그 다음에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주제다.

반복되는 아브라함의 실수를 만난다. 창세기의 흐름 속에서 볼 때, 그는 이미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죄악을 반복하는 약한 신앙이었음을 보게 된다.

 

   A 지시할 땅(12.1) 가나안(12.7)

      B 가나안(12.7) 애굽(12.10)

         C 애굽(12.10) 벧엘(13.1)

      B' 벧엘 남방(20.1- )

   A' 지시한 땅 벧엘(35.1- )

 

악인의 집에서의 천년이 주의 전에서 지낸 하루보다 못하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고통 속에서 깨닫게 된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 것이다. 애굽에서의 아우성을 겪는 것만큼 빨리 신앙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브라함처럼 될지도 모른다. 내가 선 땅은 거룩한가를 생각한다. 내 영혼의 땅을 불신앙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내 신앙의 영토를 촘촘하게 챙겨야 할 때임을 잊지 않아야겠다.

애굽은 종종 세상으로 비유된다. 하지만 성경은 애굽 = 세상 = 죄악 = 심판 = 사탄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는 동일한 성경이 애굽으로 내려가라.”(2.13)고 말씀하고 있음에서 그렇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세상의 약속을 의지하여 풍요를 따라 애굽으로 내려갔느냐 하는 점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지만(3.16), 교회와 진리와 성도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며, 섭리하시며,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신다. 그런데 이것들을 뒤로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시류를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고통과 시련을 자초하는 것이 된다. 내가 선 곳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늘 관심하는 땅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칫 정신 차리지 못하면 애굽에서 파산하여 가나안에는 탕자처럼 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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