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스타트(창 11.10-32)

20200115(묵상)

   

 

 

아브라함 스타트

Gen. 11.10-32

  

   본문 관찰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

     데라 아브람/나홀/하란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데라(아브람, , 사래)가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서 죽었더라

 

      [‘여자의 후손들 족보2]

      아브람 *이삭/이스마엘

      이삭 에서/*야곱

      야곱 르우벤//*유다/요셉(12형제)

      유다 → … → 이새 엘리압/아비나납/삼마//*다윗

      다윗 암논/길르압/압살롬/아도니야/스바댜/*솔로몬

      솔로몬 남왕국 유다 열왕들 … → 요셉 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의 족보

 

신앙(信仰)이란 무엇일까?

아브라함을 기억할 때마다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곤 한다. 창세기 121절 앞에 선 아브라함,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신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부분이다. 이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면 창세기 12장에서 만나는 아브라함에 대한 인상은 그가 마치 해성처럼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다는 무력감이다.

사실 아브라함의 등장은 구약 성경의 다른 사람들의 입문이나 출현과 비교하면 과히 파격적이다. 보통 하나님이 쓰시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부르심의 결과로서 그의 언행이 그 뒤를 따르는 구조를 띈다. , 브라함처럼 입문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유독 왜 아브라함만이 이처럼 한 순간에, 그것도 구속사(救贖史)의 중심에 등장하느냐는 점이다.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족보에서 다음 몇 가지 사실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소명(7.2b-4a)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게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7.2b-4a)

 

먼저 한 가지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아브람이 성장하던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에 대한 성서 고고학적 성과들이다. 우르는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문화는 월신(月神) 나나(Nanna)를 섬기는 많은 신전들을 낳았다. 노아홍수는 노아의 나이 600(1,656)이고 바벨의 성과 탑을 통해 인류가 흩어지게 된 것은 그가 700세 이후 어느 시점이었던 것으로 볼 때,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200여 년 전부터 이미 세상은 홍수 이전의 아수라장으로 깊은 몸살을 앓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때문에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여자의 후손) 역시 어떻든 당시 흥왕했던 문화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아브람은 언제나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당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간 것이다(24.2- ,14-15). 예를 들어(이해를 돕기 위해), 오늘 식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집은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옆에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니 언제나 목탁소리, 염불소리, 향냄새가 진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곳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며 세상을 역류하며 살아가는 셈의 후예(‘여자의 후손’)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7.2b-4a).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결단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31) 영광의 탈출(Exodus)이 시작된 것이다. 아브람은 서서히 성장해가고 있었다(하란을 떠날 때 그는 75세였다. 12.4b). 아버지 데라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다. 그런데 왜 하란에 머물었을까. 아마도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고령(高齡)인 데라가 긴 여행 중에 병이 났을 것이라는 추측이다(32). 아브람은 그곳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31b, 12.4). 하지만 바로 이 대목이 이제 그가 신앙의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죽는다. 그는 무엇을 아들에게 유언했을까.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아마 우르를 떠날 때에 계획했던 대로 가나안으로 갈 것을 권고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31, 12.4) 하란에 그냥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는 지금 주저하고 있다. 첫째 소명을 따라 우르 하란 가나안인데 지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던 것이다(31b)

   

 

두 번째 소명(12.1-3)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7.4b)

 

지금 이러한 형편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다(12.1a):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12.1a). 그는 지금 하란에 있다. 갈대아 우르가 아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너는 너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12.1a). 마침내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완벽한(perfect) 결단(탈출, 출발)을 명하신 것이다.

창세기 121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이미’(already) 알고 있었다는 점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이미 조상 때부터 섬겨오던 하나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고, 예배(제사)드리고 있었다. 그는 창세기 121절에서 해성처럼 나타난 전설적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창세기 121절 이전에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Fellowship)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았겠으며, 또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결단할 수 있었겠는가?

창세기 121절이라는 소명 앞에 서기까지 그가 지나온 75년이라는 삶의 이야기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세였더라.” 아브라함의 일생을 이야기할 때 창세기 1126-32을 매우 중요한 증거로 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아브라함의 가계(家系)를 탐험해 보면서 그 비밀의 커튼을 조용히 들추어 보려고 한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이미’(already) 시작되었으나 사람들에게는 아직’(not yet) 보여지지 않은 그런 하나님의 계획(섭리)하심의 역사를 펼쳐간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족보가 갖는 깊은 복선(의미)이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예들을 찾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3.15, 12.1-3, 13.14-18 15.12-21, 25.23, 45.5-8, 48.21(50.24) 13.19 24.32).

흔히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 먼저 창세기 12장을 떠올린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보면, 그도 긴 신앙의 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서 마침내 부르심 앞에 선 것일 게다. 여기에 대한 기초적인 대답이 오늘 본문 안에 감추어져 있다. 어느 누구도 과거 없이 현재만 없고, 현재 없이 미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신앙에 있어 하나의 상식이기에 그렇다.

먼저 족보를 통해서 보자. 그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길래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그의 족보를 추적하면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한다(9.28-29, 11.10- ). 이 족보에서 추론할 수 있는 몇 가지 의미들을 생각해 보자.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족보

 

              5.32     7.6         11.10

              502세   600세     602세      637세  667세     701세    731세     763세    793

      노아 --*------*------*-------*-----*------*------*-------*------*---->

                 셈        홍수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루우         스룩      나홀

                                100세       35세       30세     34세     30세       32세       30

 

        11.24                                9.28~29                                           21.5

                  822세                    950(노아 죽음)

      나홀 ----*------------*-*-----------*------------------*------->

                   데라                  아브람       75세에 부르심(12.4)             이삭

           29세              70                  데라 죽음(7.4)        100

 

노아는 아브람이 태어나기 2년 전에 죽는다. 이것은 매우 놀랍다. 창세기에 소개된 족보에 의하면 놀랍게도 노아와 아브라함은 거의 동시대(同時代)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있어 노아는 살아있는 역사요, 숨 쉬는 역사였음에 틀림없다. 당시는 구전(口傳) 시대였음을 우선 염두에 두라.

아브람은 아담과 에덴에 대한, 즉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홍수심판에 대해서 듣고 배웠을 것이다. 한편 아브람은 하나님이 얼마나 죄악을 싫어하시는가를 똑똑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노아는 홍수 후 350년을 더 살았다(9.28-29). 그래서 노아의 셈의 후손들, 그러니까 함의 후손들(특히 니므롯이 중심이다. 10.6-10)과는 다르게 살기로 결정한 에벨의 아들 벨렉 가문의 여자의 후손들을 통해서 너는 하나님이 택하신 셈의 후손이다”(10.21-31, 11.10- )는 택하신 계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자라면서 하나님에 대해 어떤 신앙을 가지며 성장했을까가 상상되는 부분이다.

바벨의 성과 탑 사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바벨탑에 대한 심판으로 인류의 역사는 문을 닫는가라는 긴장이 계속되는 11장 후반부이다. 타락 심판 은혜의 순환(cycle)이 바벨탑에서는 흩어짐이라는 심판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바벨의 심판을 다시금 은혜로 이어가실 것인가. 독자들의 긴장은 계속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당시 사람들의 패역과 음란,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죄의 끈질긴 생명력과 그 결과들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 족보, 다시 말해 셈의 후예로 이어지는 여자의 후손의 거룩한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깊은 고뇌였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으로 살아온 노아, 그가 최근까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브라함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그 무엇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런데 그 노아마저 하나님의 품으로 가고 말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노아는 홍수 후 350년을 살면서 하나님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방주에서 구원 받은 노아의 식구들로 시작된 신() 인류의 역사는 점점 죄악의 수렁으로 빠져만 갔다. 노아는 깊이 탄식하며 절망했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악의 물결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이다. 외치고 또 외쳐도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잊어가고 있었다(24.37-39). 그는 하나님의 부흥을 가슴에 품고 숨을 거둔다.

아브람 역시 이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과연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 이후를 어떻게 전개하실까. 노아마저 죽자, 이제 더 이상 무서워할 대상을 잃은 당시 사람들은 거침없이 죄악을 즐겼을 것이다. 이 점은 점점 데라(아브람)로 하여금 무엇인가의 결단을 내리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아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주목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부스러기 묵상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또한 누가 그 음성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고, 행하게 되는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신다. 문제는 수 없이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배워서, 학습으로, 경험으로, 탐구(연구)해서 발견되어지는 그런 분이 아니다. 그가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신다. ,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선 계시, 후 순종의 원리를 주목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언제나 우선한다. 순종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하심(찾아오심)의 결과다. 하나님은 구속사의 긴 흐름을 아브라함을 준비하셔서 계속 이어 가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일하신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당신의 역사를 부흥시킬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하고 계신다. 이 시대가 어렵고 암담해 보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계획을 주목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등장은 곧 하나님의 은혜의 싸인(sign)이다. 이것이 구속사의 진전 속에서 고백하게 되는 신앙이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a) 아브라함은 누구며, 나는 또 누구인가. 그와 나의 차이는 무엇이며, 한편 공통점은 무엇인가. 하나님도 그때 그분이고, 나 역시 하나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고, 섬기도 있다면 아브라함과 같은 사건이 나에게도 은혜로 주어지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또 하나의 아브라함이 출현하는 것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가. 감히 이 사건이 나와 자녀에게 임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어 본다. 하나님이 나를 아브라함처럼 부르신다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

11장을 묵상해야 하는데 12장까지 너무 멀리 나와 버린 느낌이다. 사실이다. 주일학교 때부터 듣고 배워 온 아브라함은 내게 늘 넘을 수 없는 숙제였고, 그것만큼 부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브라함처럼 되기란 쉬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두 번째 소명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그가 머물러 있는 하란은 분명 소명의 땅이 아니다(31b). 첫 번째 소명이라는 위대한 계시 사건을 통과해 순종의 길을 떠나왔으나 그는 노중에서 그만 주저앉고 만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31b)

나그네 인생길, 이것이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배워야 했을 본향인 천국으로 가는 연습이었을까. 바벨의 성과 탑을 경험한 함의 후예들이 만들어가는 세상 문화의 범람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그리하여 여자의 후손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하기 위한 거룩한 씨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은 소수의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거룩한 메시지를 듣게 하시고 거기에 순종하도록 이끄신다. 마침내 아담() 노아()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거룩한 역사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11장의 [여자의 후손] 족보 속에 숨겨진 생명이다. 이 생명의 씨가 좀 더 멀리 아브라함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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