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대첩(창 11.1-9)

20200114(묵상)

  

 

 

바 벨 대 첩

Gen. 11.1-9

  

   본문 관찰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vs

 

   A 하나의 언어와 인류(1-2)

      B 인간의 성쌓기(3-4)

         C 하나님의 강림(5)

      B' 하나님의 성헐기(6-7)

   A' 다중 언어와 흩어짐(8-9)

 

어찌된 게 함이 주도하는 문화가 세워지고 있다(10.6-20).

특별히 바벨탑과 성이 그랬다(2,9, 10.10). 함은 누구인가? 가나안의 아비, 즉 노아의 아들로서 아버지 노아의 실수를 낳은 소위 [포도주 사건]에 연루되어 세 번이나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았던 아들이다. 그런 그가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10.20)를 이루어 일취월장(日就月將) 찬란한 문화를 창출해 나가고 있다. 누가 보아도 노아 이후, 그러니까 홍수 이후의 역사를 주도하는 것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다.

놀라운 것은 바벨탑과 성은 이러한 함의 문화의 상징처럼 쌓아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이처럼 세워져가는 도시문화와 도시건설에 있지 않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영적(靈的)인 관찰인데,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시도들이 철저하게 반신문화(反神文化),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흐름이었다는 점이다: “,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 8.17, 9.1) 홍수심판을 유월하여(pass over) 살려줬더니 고작 하는 게 이런 죄행(罪行)이란 말인가.

   

 

바벨탑과 성()

 

홍수 이후의 새로운 세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바벨탑을 쌓은 곳이 시날평지’(2)바벨’(바벨은 쌓은 성 이름이자 지명이다. 9)이다. 그런데 이곳은 함 구스 니므롯으로 이어지는 족보(10.6-12)를 보면 함의 아들인 구스의 여섯째 손자(孫子) 니므롯이 세운 나라와 성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10.10-12)

이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은 이렇듯 불과 노아의 증손(曾孫)의 대()에서 홍수 이전의 모습으로 회귀한 것을 의미한다. 이를 셈의 후손에서 계산해 보면 셈의 증손인 에벨의 아들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뉜 것으로 봐 홍수 후 불과 100년 만에 이처럼 하나님과 무관한 반신문화(反神文化)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10.21-25). 노아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그가 보는 앞에서 세상이 홍수 이전과 방불한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다.

바벨은 영적으로 볼 때 동쪽에 세운 땅의 도시’(하나님의 도성, 낙원)의 예표가 된다(2,9).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땅을 지배하라는 명령(9.1)을 인간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정면으로 반역하면서까지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b)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간과하지 않으셨다. 이는 아담에서 노아시대까지 살았던 사람들과 방불한 죄악이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흩어지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하셨는데 바벨주의자들은 흩어짐을 면하자!”(4)며 정면으로 하나님을 도전한다. 벽돌과 역청으로 이루어진 당대 최고의 기술과 문화가 하나님 보다 더 높고 든든하게 세워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겨루겠다는 바벨의 무법자들이 아니고 누구랴!

함이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버지, 찾아오신 하나님과 대면하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유일한 창구였던 아버지, 당대의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했던 아버지, 120년의 방주건설과 1년의 홍수를 거쳐 새로운 세상에 나오자마자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던 아버지, 바로 그 아버지를 지근거리에서 비켜보며 자랐던 아들이다. 어찌 보면 축복의 통로였던 아버지 때문에 홍수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홍수 이후를 은혜로 살게 된 아들이다. 그런 그가 이처럼 돌변하다니! 이를 두고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고 하겠지!

   

 

하나님의 심판

 

바벨(아카드어, bab-ili; ‘신의 문’)의 죄는 명백하다. 그것은 ,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는 언행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정면으로 대적한 점에서 그렇다. 노아와 그 이후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담에게 주어진 문화명령과 연속선에 있는 새 문화명령을 통한 흩어짐이었다(8.17, 9.1). 그런데 흩어지지 않겠다고 바벨탑과 성을 쌓고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밖에! 심판은 지금까지 하나였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써 거의 강제적으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심 것으로 집행되었다(9).

하지만 심판이 곧 끝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인내와 사랑과 은혜를 베푸심으로 피할 길을 내사 저희로 능히 감당케 하셨다(고전10.13). 이렇듯 단지 흩어짐만이 주어진 셈인데, 그렇다면 결국 원치 않았던 흩어짐이 현실로 다가왔다면, 아마도 자신들의 문화와 힘으로 흩어지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불신앙을 접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 옳다. 하지만 함과 그의 후손들은 결코 회개하지 않았다.

한편 지금까지 근 1,800여 년이나 변함없이 계속되었던 인간의 죄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은혜를 수납하는 인간으로 이어지는 사이클(cycle), 즉 심판에서 은혜로 이어지는 국면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흩어짐으로써 인류의 미래는 마침내 끝나는가. 과연 심판이 최후의 보응인가 말이다.

감추어진 은혜처럼 보이는 그림으로 말미암아 이런 질문 앞에 잠시 서 본다. 인류는 더 이상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어느 때나 결국은 하나님의 해답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지만 바벨탑이 무너진 것처럼 인류 편에서의 모든 희망은 무너지고 말았다. 흩어짐으로 말이다. 이제 이 흩어짐 안에 은혜는 감추어져 있는 듯하다.

   

 

부스러기 묵상

 

바벨탑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노아와 세 아들이 지금껏 하나였던 삶은 해체되고 마침내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느 아들에게서 여자의 후손의 족보가 이어지게 될까. 노아의 예언은 성취될 것인가(9.20-27). 이어지는 또 하나의 족보(11.10-32)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 분명하다. 하나님은 바벨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점도 고려되어서다.

사실 하나님의 심판, 즉 흩어짐이라는 처방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심판이 아니라 은혜다. 왜냐하면 반신문화(反神文化)로 치닫는 인류의 흐름을 하나님께서 끊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냥 두었으면 함 vs (야벳)으로 대칭되는 공존(공생, 상생)할 수 없는 두 극은 급기야 공멸로 끝이 났을지도 모른다.

어느 때나 하나님은 선()과 악()을 함께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거룩한 노아의 후손이 이어가야 할 예언이 여전히 유효하고, 더더욱 이를 여자의 후손이 맡아야 한다면 하나님은 이런 혼탁한 세속문화, 즉 이 참담한 인본주의(人本主義)와 반신문화(反神文化)로 치닫는 세상을 역류하며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들을 모르실리 없으시다. 그분의 귀와 눈은 바벨탑과 그 성 안에서 세상과 공존하는 자들이 아닌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10.25)의 반열에 선 자를 찾으신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보는 눈을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의존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자 그분이 쓰시는 사람이다. 휘황찬란한 바벨문화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하나님 없는 문화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가 나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바벨의 후예됨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는 때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승부하며 사는 사람, 여자의 후손됨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 때문에 희망은 아직 남아있다. 셈의 후예가 동녘 하늘에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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