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행전에 넣어주실 벧엘2(창 35.1-15)

20200524(양무리교회)

  

 

 

내 인생행전에 넣어주실 벧엘(2)

Gen. 35.1-15(2)

  

   밧단아람에서 벧엘까지

   ∙밧단아람에서의 20(28-31, 31.38)

   ∙얍복나루에서 만난 하나님(32.24-32)

   ∙형 에서와의 화해(33.1-17)

   ∙세겜이라는 복병(33.18-20 34) 딸 디나가 무너지다.

   

 

벧엘로 올라가라!

 

야곱은 20년 밧단아람 처가살이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31.3)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마침내 출생지’(31.13)로 돌아가는 귀향길에 오른다. 하지만 32-34장에서 야곱은 요동친다. 20년 전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갈 때와 다른 흔들림이다. 그야말로 금위환향(32-33, 얍복나루 & 형과의 화해)으로 쭈욱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바로 세겜이라는 돌발사태를 34장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딸 디나는 세겜의 추장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이에 아들들은 피의 복수를 감행한다. 여기서 끝내 야곱은 절규한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은 멸망하리라.”(34.30b)

여기가 야곱의 밑바닥이다. 야곱이 누구인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 아닙니까. 그런데 죽어 멸망한다고 소리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 그리고 자신이 한 벧엘언약은 안중에도 없다. 사람이 위기를 만나면 이런다. 하지만 천하의 야곱이 아닌가.

그러고서 35장이다. 때문에 35장은 은혜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휘청거리며 불순종에 따른 비싼 대가를 지불한 야곱이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시는가.

   

 

하나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야 곱: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야곱이 밧단아람 20년 이후 귀향길에 써온 보고서(32-33)가 갑자기 초라해져 버린 34장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르신다. 35장이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1)

하나님은 과거가 아닌 미래로 가신다. 하지만 그 미래는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 은혜의 만남이 이루어진 약속의 땅 벧엘이라 하신다. 그러니까 미래는 세겜이 아니라 다시 벧엘이라 하신다. 하나님은 다시 야곱행전에 넣어주실 벧엘을 손에 들고 세겜으로 야곱을 찾아오신다. 어쩌면 피난처라 생각했던 세겜이 무덤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시련일 때다. 지금 이때는 지난 20년 전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1)와 비교되는 어려운 순간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어렵고 힘든 시절에 만나주신 벧엘의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하신다: ‘야곱아, 네가 설 곳은 밧단아람도 세겜도 아니고 벧엘이다.’

태초에 에덴에서도 그러셨다. 아담이 천지창조와 이를 통해 설계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타락으로 말미암아 다 물거품이 되게 한 아담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죽옷을 손에 들고 동산 나무 뒤에 숨어 벌벌 떨던 죄인 아담을 찾아오셨다. 이처럼 야곱은 뜻 밖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돌아서라. 네가 살 곳은 세겜이 아니다. - 네가 살 곳인 하나님 없는 세상이 아니다.

-정신 차릴 때도 되었다. -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

-얍복나루의 승리가 이후의 평강과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 응답하라!

-얍복나루의 은혜를 유지하고 지켜낼 능력이 없다. -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때문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멜로디가 아닌가: ‘아들아, 이제 집으로 가자!’ 세상은 다 손가락질해도 부모는 그 자식의 손을 붙잡고 이제 집으로 가자!”라 품어낸다. 하나님은 지금, 깨진 옹기그릇 같은 야곱을 사랑으로 안아주신다. 하나님은 무너져가는 야곱을 찾아오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야곱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때마다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20년 전 형을 피해 도망할 때,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얍복나루에서, 그리고 지금 세겜에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벧엘에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비록 넘어져 있다 해도 그것은 끝닌 것이 아니다. 아직 희망은 있다.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언제나 믿어주시고, 안아주시고, 비록 세겜일지라도 다시 품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야곱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이제는 더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 앞에 선다. 마침내 야곱은 영적 대각성의 고백으로 응답한다.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예배자로 나아간다(2):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마침내 야곱은 하나님 앞에 선다. 하나님께만 예배하기로 결단한다. 그는 세겜에서 잃었으나, 그러나 이를 다시 벧엘에서 회복하기로 결정한다. 때때로 시련과 고난은 무너지고 잃어버리는 것을 낳는다. 하지만 더 큰 그림에서 보자면 작은 실패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은혜와 축복이 시작점이다. 또한 회복되는 새로운 씨앗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실패가 다시 또 이어지는 실패와 무너짐을 낳게 해서는 안 된다.

실패했지만 거기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실패가 실패일 수 없다. 나의 실패는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지점이어서다. 하나님은 그리하시는 분이시다. 실패마저도 은혜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 그것이 우리의 세겜마저도 은혜되게 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이다.

   

 

두 번째 벧엘(7-15)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9)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11)

 

, 벧엘이다. 알지?(7-8)

마침내 야곱은 20년만에 다시 벧엘에 왔다. 창세기 28장에서 첫 번째 벧엘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1)에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을 만났을 때다. 그런데 야곱이 두 번째 벧엘에 왔을 때는 놀랍게도 하나님은 20년 전 야곱이 서원한 것이 응답된 모습이다. 야곱은 세겜으로 가 그만 그 은혜를 잠시 잊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벧엘에 서게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야곱의 세겜이라는 회복은 이렇듯 야곱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야곱은 20년만에 이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이제야 야곱답다. 그는 벧엘 거기서 제단을 쌓고”(7)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믿고 깨닫은 자는 이처럼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다. 이게 예배자다. 마침내 야곱은 20년만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선다.

 

하나님의 축복(9-15)

그러자 하나님이 다시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복을 주신다(9). 역시 야곱은 하나님을 예배한다.

*10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11- 창조명령을 받고 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12땅과 후손

 

야곱이 서 있어야 할 곳은 세상 세겜이 아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그 하나님을 만난 벧엘이다. 이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혹 우리 자녀들은 지금도 세겜을 기웃거리고 있지는 않는가. 세겜은 야곱이 잠시 반면교사처럼 경험한 것으로 족하다. 벧엘이 안전하다. 벧엘이 소망이다. 벧엘이 축복이다.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이다.

그러려면 야곱과 그의 공동체가 했던 결단이 필요하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2) 4절로 응답한다. 벧엘의 복을 받아 누리려면 우리도 버려야 한다. 죄와 옛습관과 세상적인 것들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들을 버리고 정결한 신부로 단장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

 

 

부스러기 묵상

 

두 번째 벧엘에로의 부르심은 부끄럽고 죄스러운 세겜에서 시작된다.

세겜마저도 은혜로 바꾸신다. 야곱은 세겜에서 그만 무너졌다. 밧단아람에서 20년을 라반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귀향길에 오른 후에 얍복나루에서 천사와도 씨름하며 이겼다. 형 에서와도 화해하는 승리와 영광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승리와 축복과 응답을 밑천 삼아 다시 더 새롭고 큰 은혜와 순종으로 이어가는 일에 실패한다. 이게 세겜이 주는 아픈 기억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세겜에서 새 일을 시작하신다. 하나님은 바로 그 세겜으로 야곱을 찾아가신다. 쉬워 보이지 않는 적용점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우리 안에 있는 세겜과 같은 것들을 하나님은 대면하라 하신다. 비록 상처 나고, 실패했고, 그래서 맞닥트리고(대면하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그 황무지에서도 장미꽃을 피워내라 하신다. 나는 네가 세겜이어도 사랑했다. 그리고 품었다. 그럼 너는?

때문에 놀라야 한다. 혹시나 내가 이리 무너지고 형편없이 살아도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살리시네가 아니다. 오히려 죄송하고, 그래서 더 잘해야겠구나!’라는 영적 각성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야 세겜에서 또 다른 죄의 가지치기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자칫 우리는 세겜이 또 다른 죄를 낳은 씨앗이 되도록 할 수 있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세겜을 끊어내고 벧엘로 올라가자. 이제 그럴 때도 되었다. 이제는 영적으로 좀 철도 들 때도 되어서다. ()은 벧엘에서 받겠다고 하고, 그래서 약속을 받아내고, 그러니까 은혜는 벧엘이라 할 수 있는 교회에서 받고, 그리고서 정작 그 은혜를 세상이라 할 수 있는 세겜에서 누리며 쓰면서 마음대로 살겠다? 이건 아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이 벧엘에서의 만남을 20년이나 준비하고 기다리셨다. 이 기나긴 세월동안 하나님은 한 번도 야곱을 잊지 않으셨다. 그는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며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다. 그것도 모르고 형과 아버지와 외삼촌 라반을 속이고, 아니, 하나님까지 돌려놓고 세겜에서 잘 살겠다고 했으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셨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행전에도 이처럼 은혜의 벧엘을 넣어주고 싶어하신다. 그러니 세겜에 머물러 있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은 야곱을 설득하시며 벧엘로 가라 하신다. 하나님은 아들아, 이제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가자!” 하신다. 내 인생행전 패이지에 끼워 넣은 세겜을 슬쩍 빼내시고서, 벧엘로 인도하신다. 이게 은혜다.

 

 

제목 날짜
열일곱살 요셉, 감사합니다(창 37.1-11). 2020.08.11
에서의 후손들(창 36.1-43) 2020.08.10
내 인생행전에 넣어주실 벧엘2(창 35.1-15) 2020.08.10
내 인생행전에 넣어주신 벧엘1(창 35.1-15) 2020.08.10
결(結)_벧엘체험(창 35.1-29) 2020.08.10
전(轉)_디나사건(창 34.1-31) 2020.08.10
승(承)_화해행전(창 33.1-20) 2020.08.05
기(起)_얍복대첩.b(창 32.21-32) 2020.08.05
기(起)_얍복대첩.a(창 32.1-20) 2020.08.05
야곱 vs 라반, 그 절묘한 시소게임(창 31.1-55) 2020.08.05
야곱주식회사(창 30.25-43) 2020.08.04
12지파 파노라마(창 29.31-30.24) 2020.08.04
야곱의 결혼이야기(창 29.1-30) 2020.08.04
기도③: 야곱의 기도(창 28.1-22) 2020.08.04
이삭의 기도(창 27.1-46) 2020.08.03
이삭 vs 아비멜렉: 승자의 법칙(창 26.26-35) 2020.08.03
다시 브엘세바로!(창 26.17-25) 2020.08.02
그랄의 추억(창 26.1-16) 2020.07.30
에서 vs 야곱: 장자권 이야기(창 25.19-34) 2020.07.30
아브라함, 또 다른 이야기(창 25.1-18) 2020.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