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轉)_디나사건(창 34.1-31)

20200225-26(묵상)

  

 

 

()_디나사건

Gen. 34.1-31

  

   본문 관찰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1)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2)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14)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15)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24b)

   제3일에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25)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30)

   

 

험악한 세월이야기c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

 

악이 악을 낳는 악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문제는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의 증표(sign)인 할례가 인간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야곱에게서 있어 심각한 언약의 위기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가 아닌 자신의 목숨에서 이 사건을 조망하고 있다(30).

 

 

강간 당하는 디나(1-12)

 

   [아브라함언약]

   “네 자손이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15.16a)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노니”(15.18)

 

   [아버지 이삭의 축복]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28.4)

 

   [벧엘언약]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28.13b)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28.21a)

 

   [밧단아람에서 하나님께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31.3)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31.13b)

 

       →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100 크시타에 샀으며”(33.18-19)

 

야곱은 20년 밧단아람 생활을 마치고 출생지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31.13b). 그리고 귀향하는 길에 라반과 언약을 맺고 20년 묵은 갈등과 분노를 해결한다. 그리고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형 에서와의 화해 또한 극적으로 이루어낸다(33.1-11). 이로써 벧엘을 지나 아버지 이삭을 만나는 길에 놓인 모든 장애와 방해들이 해결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야곱은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곳에 땅을 사고 정착한다(33.17-19). 이상하지 않은가. 땅은 이미 조상 아브라함에게서부터 하나님이 주시겠다 하셨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땅을 산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정착하겠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일이 어긋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조부 아브라함은 아버지 이삭의 배필, 즉 야곱의 어머니를 가나안 백성들 가운데서 택할 수 없다는 분명한 신앙이 있었고, 이 생각은 아버지 이삭에게서도 동일했었다. 이것은 에서가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을 근심한 대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한편 지금 야곱 역시 부모님처럼 처자를 하란(밧단아람)에서 이루었다. 그런데 자신의 12 아들들은 형 에서처럼 가나안 한 복판에서 생활하고 정학하고 교류하는 생활 터전으로 몰아넣는다.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1)을 정도였다. 그만큼 거룩한 아브라함의 씨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세겜이 같은 리듬으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환경과 상황과 분위기에서 그만 사건이 터진다. 딸 디나가 강단을 당하고 만다. 좁게는 한 딸의 인생이고, 넓게는 언약 백성의 미래와 연결된 뇌관이다.

하지만 야곱은 딸이 강간을 당했는데도 잠잠하다(5). 어떤 언행도 없다. 외삼촌과의 20년에 대한 코멘트는 감동적이다 못해 놀라운 영적 통찰력까지 흘러 넘쳤다. 이번에는 히위 족속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통해 죄는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언약의 핵심이라고 수 있는 후손과 땅’(9-10)이 하몰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어쩌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위기이자, 자칫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는 심각한 국면이다.

과연 야곱은 이 제안을 받음으로써 세속화될 것인가. 이로써 디나의 강간사건은 단순히 딸이 성폭행당한 것 그 이상인 것이 드러난다. 과연 벧엘을 거쳐 아버지 이삭이 살고 있는 자신의 출생지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가나안 땅 세겜에서 히위 족속이 주는 후손과 땅을 받아 하나님이 아닌 세겜을 하나님처럼 섬길 것인가.

   

 

할례를 받으라!(13-17)

 

하몰은 후손과 땅을(9-10), 야곱의 아들들처럼 세겜은 할례를(14- ), 이렇게 되면 가나안 족속과 언약의 후손들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다: “한 민족이 되려니와”(16b) 놀라서 기절할 일이다. 실로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위기다. 점점 디나사건은 심각한 영적 전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어찌하랴!

문제는 야곱의 아들들이 거룩한 할례를 속이는’(13) 메뉴로 사용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창세기 15장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17장에서 언약 백성이 되는 표(sign)으로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은 할례를 행하라 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히위 족속 중 하몰과 세겜이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아브라함의 씨가 아닌 이방 가나안, 하나님으로부터 결국 400년 후에 심판 받을 것이라 예고된 자들이 할례라는 형식을 통해 언약 백성이 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따르고, 예배하는 자들이 아니다. 지금 일어난 디나의 강간사건을 빌미로 이스라엘과 하나가 되는, 그래서 약속의 땅과 아브라함과 이삭으로부터 난 백성이 아닌 히위가 아브라함의 자리에 앉게 되는 일이 일어날 참이다.

이 엄청난 일이 백주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에게서 일어나려고 하는 중이다. 이 위기와 생사의 갈림길에 처해 있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속이는 일은 아버지 야곱에게서 아들들에게로, 훗날 이들은 요셉을 팔고서 아버지마저 속이는 일로 비화된다.

속이는 거짓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10계명 중 제9계명)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시금 묵상의 저울에 올려본다.

   

 

불의한 보복(18-29): 할례가 보복의 도구가 되다.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야곱 공동체와 통혼을 논의한다(21). 이를 위해 야곱의 아들들이 제안한 할례를 받기로 하고 그 모든 남자가 할례’(24)를 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양쪽 모두 겉으로 드러난 목표는 같지만 속마음을 달랐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야곱의 아들들은 보복하기 위해 할례를 제안했고,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 역시 통혼을 통해 결국 저들을 흡수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23a)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하는 표시인 할례(17.10-14)를 인간적인 보복과 욕망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목적을 이루겠다는, 그런데 그 수단과 방법이라는 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할례라는 점에서 위기는 증폭된다.

   

 

야곱의 시각(30-31): 그들이 나를 죽이리니

 

아버지 야곱이 왜 딸 디나의 강간 소식을 접할 때부터 소극적이면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는지가 드러난다. 그는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 쯤으로 생각했다. 딸의 고통과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과 아들들의 보복이 자신에게 화()라는 불행과 재난과 근심이 되는 것을 더 우선시하였다.

그리고 할례를 통한 보복은 더 큰 재앙이 되어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30b)고 보았다. 그는 히위 족속과 하몰(세겜)이 자행한 죄악에 대해서는 뭐라 언급이 없다. 그는 땅을 사고 이곳에 정착하려는 계획이 일그러진 것에 대해 분노한다. 이게 야곱이라니 참 실망이 아닐 수 없다.

,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땅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은 지금 야곱과 그의 아들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밧단아람에서 얻은 재산과 식솔들, 태중에 잉태한 베냐민을 포함해 12 아들들, 그러니까 자신이 20년 동안 밧단아람에서 죽을 고생해 마침내 얻는 성공을 지켜내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눌러앉아 세겜화(세속화) 되어가는 야곱을 그대로 바라만 보고 계실 것 같지 않다. 이것이 지금껏 진행되어온 말씀과 인생의 흐름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야곱은 또 하나의 불씨(뇌관)를 품에 안고 있는 셈이다. 어찌보면 자업자득이다. 벧엘이 아닌 곳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찾은 대가 치고는 참 아프다.

   

 

부스러기 묵상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얻으라.”(9-10)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이 땅을 주리라!”(35.11-12)

 

마침내 야곱의 후손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과 긴장이 조심스럽게 야곱의 뜰에 뿌려지고 있다. 과연 이 씨앗이 자라 어떤 나무와 열매가 되어 야곱 앞에 나타나게 될지 . 어차피 하몰과 세겜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이 자리할 틈이 없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다. 지금 야곱과 그의 공동체에 뭐가 가장 문제인가. 디나의 아픔과 절망도 문제다. 할례를 복수의 수단으로 삼은 것도 문제다. 세겜과 하몰이 당한 일을 보고 들은 이웃 족속들이 야곱이 두려워하듯 야곱과 그의 공동체를 보복하기 위해 전쟁을 선언할 수도 있는 것, 이것 역시 문제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야곱 공동체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앞서 아브라함을 통해 하신 말씀(언약)과 지금껏 야곱이 만나고 경험하고 알고 믿은 하나님이 이 상황과 형편임에도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누구도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 이게 야곱 공동체가 맞이한 가장 큰 위기다.

과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은 뭐라 말씀하실까. 언약을 성취하게 위해 밧단아람을 떠나 벧엘을 지나, 마침내 아버지 이삭이 거주하는 자신의 출생지로 돌아가는 것이 지금 하나님의 명령인데 그만 세겜에서 그 길을 잃어버린 셈이다. 이런 방황과 휘몰아치는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갈 길 몰라 방황할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렇다, 인생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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