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承)_화해행전(창 33.1-20)

20200224(묵상)

  

 

 

()_화해행전

Gen. 33.1-20

  

   본문 관찰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4)

   야곱이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17)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18)

 

         A 그가 400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32.6)

            X1 야곱의 기도(32.9-12)

            X2 얍복 나루의 씨름(32.24-32): 이스라엘

         A’ 에서가 400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지라(33.1)

   

 

20년만의 만남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8b)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9)

 

실로 20년만의 형제 상봉이다(31.38,41).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생 야곱을 향해 오던 출발과(32.6/) 마침내 동생과의 실제 만남(1-4/)은 조금은 예상(?)을 싱겁게 만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그 사이에 전개된 이야기(32/X1.X2)가 어떤 작용을 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한다. 어떻든 두 사람 사이의 충돌할 것처럼 보이던 만남은 형제 사이의 이산가족의 아름다운 상봉으로 넘어간다.

   

 

20년만의 만남(1-16)

 

20년 전,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망하기 이전, 앞 야곱의 이야기에서는 위기의 때에 누군가가 개입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버지 이삭의 축복에서 멀어진 형 에서의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에 이삭과 리브가가 적극적으로 차남 야곱을 보호한 일이다([1]/27.42-45, 28.1-4). 그리고 다시 20년이 지난 후에 귀향길에 오른 야곱을 추격해 오는 라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라반의 언행을 바꿔 놓으신 일이다([2]/31.24,29). 그런데 400명이나 되는 장정들을 거느리고 동생 야곱을 향해 달려오는 형 에서의 움직임을 전후해서는 특별한 분위기가 감지되지 않는다.

때문에 야곱이 귀향길에 먼저 형 에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러자 형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동생 야곱을 만나려고 온다는 소식을 듣는 때부터(32.3-6) 형을 대면하는 순간까지(1-4) 그럼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사뭇 궁금하다. 바로 32장이 그렇다는 얘기다. 놀라운 것은 이 부분이 앞서 위기의 때에 등장하던 방식(부모/[1], 하나님/[2])과는 전혀 다른 쪽에서 뭔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일단 에서에게 개입하신 흔적이 없다. 20년 전 하나님이 하신 일 -수태고지에 대한 아버지 이삭의 야곱 축복(25.23)- 을 두고 이를 냉정하게 비웃었던 에서다. 이어 동생이 자신의 축복을 가로채자 아버지의 장례식을 동생의 장례식과 함께 치를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완곡하게 거절했던 에서다(27.41). 그후 결혼에서도 부모의 근심이 되었는데 2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에서에게서는 긴장감이 흐른다. 400인의 장정을 거느리고 동생 야곱을 맞는다는 것, 그렇다면 이건 반역이다. 야곱이 살아온 20년을 볼 때 더 그렇다.

어떻든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섭리를 진행중이시다. 이를 에서라 할지라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지금 그는 400인의 군사(장정)을 거느리고 야곱을 향해 진군한다. 아담과 가인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하나님의 계획은 위기에 처한 듯하다. 앞서 하나님은 야곱의 외연을 통해 그를 보호하셨듯 이번에도 에서(외연)를 어찌하실까 하고 지켜봤으나 그런 어떤 흔적도 없다. 그래서 32장이 갖는 위치를 더 주목하게 된다.

, 그럼 야곱이다. 하나님의 승부수는 앞서 형의 축복을 가로챌 때와, 라반이 추격해 올 때 하신 것과 달랐다. 이번에는 외연 곧 주변 환경이나 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은 야곱을 직접 겨냥한다. 마침내 야곱은 진군해 오는 400인의 장정들을 앞에 두고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께 항복한다. 하나님은 야곱을 만지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보호와 인도하심을 확증하고서 형 앞에 선다.

하룻 밤 사이, 형은 결투와 보복이 아닌 화해와 재회의 기쁨을 나눈다. 창세기 기자는 무엇이 에서를 그리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지만 어떻든 결과는 긍정적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전날 밤 얍복 나루에서 야곱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에서 쪽에서 이처럼 문제가 풀린다. 기적이 일어난 셈이다. 하나님은 33장에서 형 에서 앞에 서기 전 얍복 나루에서 야곱을 다루신 것이다. 이것이 야곱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비밀이고 선물(은혜).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과 얍복 나루의 씨름 곧 만남이 있었고, 그러자 이제 에서도 용서와 눈물로 문제를 풀었다면 내가 에서처럼 해결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하나님과 늘 대립각을 세우는 것처럼 언행했던 에서가 이처럼 하룻 밤 사이에 멋진 신사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내게도 에서처럼 양보하고, 내려놓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주님의 마음으로 품고 가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야곱과 같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33장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은혜의 사건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침내 20년 묵은 형제 사이의 갈등과 분노와 상처가 치유된다. 창세기 기자는 왜 갑자기 33장에서 두 형제가 20년 만에 만나자마자 화해하게 되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소상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야곱은 변화되었고,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선다. 이제 20년이 지난 때의 야곱은 진심으로 형을 존중하고, 용서를 구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나 형을 속이고 거짓말을 한 것은 옳은 행위가 아닌 것을 20년이라는 밧단아람 생활에서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나도 야곱처럼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고, 지난 상처와 매듭을 풀어야 할 자는 없는가. 때로 우리는 위를 향해서만이 아니라 아래로 어린 자녀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한다. 용서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듯 용서 받은 자로서 용서하는 것은 복음이 말하는 삶의 방식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

   

 

숙곳과 세겜생활(17-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20)

 

자기를 위하여’(17) 지금 숙곳에 머물 때인가. 가야할 곳은 벧엘이고, 그리고 이어서 고향이다. 그런데 세겜이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벧엘로 가는 길이 아니었던가. 20년의 밧단아람 생활과 그곳을 출발해 얍복나루를 건넌 일, 그리고 형 에서와 극적인 화해를 한 일이 일단락된 것에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세겜 정착이어서 하는 얘기다.

아니나 다를까. 비록 고난이라는 파도타기 같기는 했어도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방향을 잡아주시고, 얽힌 매듭을 풀어주셔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벧엘로 무사귀환하게 하시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서약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야곱이 모를 수 없었다. 그런데 멈추었고, 거기에 정착하고야 만다. 그러나 비극은 이처럼 소리 없이 밀려오고 있는 중이다. 그 파괴력은 앞서 맛보지 못했던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야곱행전이 그만 세겜의 급류에 휩쓸려 갈 뻔 한 일이 일어난다. 그게 34장이다.

 

 

부스러기 묵상

 

 20년 만의 만남이 복되기만 하다!

서로의 묵은 과거를 떨어버리는 화해가 참 아름답다. 이 보이는 그림을 위해 지난 밤, 야곱만이 아는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 형이라는 에서는 20년 만의 동생과의 만남임에도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올 수 밖에 없는 상처가 있었다. 이 일은 그래서 그리 간단하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야곱의 평생은 여기서 멈출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에서는 뭔가를 작심하고서 출전한 싸움이어서다.

  하지만 늘 문제는 어떤 사건이 잘 마무리된 이후다. 모든 것이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될 수도 있었음에도 극적 화해와 샬롬으로 일단락되었으면 그 다음도 앞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야 맞다. 하지만 뭔가 좋지 않은 분위기다. 이어지는 행로가 벧엘로 가는 길이 아니고 세겜이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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