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③: 야곱의 기도(창 28.1-22)

20210725(양무리교회)

기도시리즈: 이삭의 기도(27.1-46)

기도시리즈: 야곱의 기도(28.1-22)

기도시리즈: 모세의 기도(출32.21-35)

   

 

기도: 야곱의 기도

Gen. 28.1-22

 

 

    본문 관찰

 

    이삭이 야곱에게 한 명령(1-5)

    에서의 또 다른 결혼(6-9)

    가나안을 떠나는 야곱과 하나님의 나타나심(10-22)

  

 

벧엘기도원

 

에서와 야곱 둘 다 아버지 이삭에게 기도(축복)를 받았다(27).

이제 이들은 어찌될 것인가. 이것이 이어지는 28장을 주목하는 이유다. 무엇이 이들 형제의 인생을 견인해 가는가. 이를 두 사람의 방향이라는 주제를 통해 살펴보자. 28장은 에서와 야곱의 인생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방향을 27장에 이어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과연 이 두 사람의 인생 나침반의 방향은 어디로 향할까. 이것을 주목하는 것은 그 중심에 야곱의 기도가 자라하고 있어서다한편 에서는 점차 시야에서 사라진다. 둘의 간격이 벌어지는 것만큼 방향 역시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방향1]

결혼: 아브라함-이삭-야곱 vs 아브라함-이삭-에서(1-9)

   ∙에서: 아브라함-이삭/리브가-에서 가나안/이스마엘 가문 - 불순종, 불신

   ∙야곱: 아브라함-이삭/리브가-야곱 아브라함/리브가 가문 - 순종, 믿음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27.46; 26.34-35 참조)

 

 야곱 vs 이삭/리브가의 가문(1-5)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위해 하란으로 종을 보내어 리브가를 며느리로 맞았다. 이 일의 중심에는 그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종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결혼에는 하나님의 간섭(섭리)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게 리브가가 아브라함과 이삭 가문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삭은 야곱을 처가인 하란으로 보내어 아내를 맞게 한다. 이를 위해 28장은 이삭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곱의 결혼을 바라보며 축복한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아들의 결혼을 이루어갔듯이 이삭 역시 그의 아들 야곱이 이렇듯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정을 꿈꾼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방향은 형 에서가 선택한 가나안의 이방 문화는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가정(가문)의 땅에서 아들 야곱이 하나님이 이미 넣어주신 축복(25.23b)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리라.”- 을 자라게 할 수 없다는, 그러니까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알았고, 마치 심고 물을 주고 자라 열매를 맺는 것까지의 모든 방향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바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야곱이 순종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잇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방향이 맞다.

 

에서 vs 이스마엘 가문(마할랏, 6-9)

하지만 에서는 의도적으로 부모 이삭과 방향을 달리한다. 그는 아브라함 이삭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끊어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스마엘가문과 연결되는 것이 그것이다(9).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 이스마엘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이다. 에서 역시 바로 이 라인(방향)에서 태어난 이삭의 아들 아닌가. 그런데 그는 27장 이후를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의 방향이 아닌,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그것도 작심하고서 하나님 밖으로 인생의 걸음과 방향을 내딛는다.

이처럼 무엇보다 아프고 시린 것은 에서의 인생과 그 가정의 방향이다.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에서는 가나안 헷 족속에게서 얻는 본처들(26.34-35) 외에 이번에도 역시 이스마엘의 딸을 취함으로서 부모의 명을 따라’(7) 순종하는 야곱과 분리되어지면서 다른 방향으로 추락하고 만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향함으로써 점점 하나님과 멀어져 간다.

   

 

[방향2]

축복: 부모(이삭)와 하나님(10-15)

 

    축복의 흐름

    ① 하나님: 수태고지로에서(25.23)

       → 이삭: 야곱이 에서의 모습으로(27.27-29)

             → 이삭: 야곱에게(28.3-4)

                    → 하나님: 야곱에게(28.13-15)

                        ● 야곱의 응답: 서원(28.20-22)

 

         ③ [아버지 이삭]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3-5)

 

         ④ [하나님]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12a)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12b)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13a)

 

              →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13b-15a)

 

이삭이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다시 한 번 더 축복하는 장면이다(②→③). 아버지 이삭은 이제야 비로소 아브라함 언약(후손, ; 창세기 15)이 아브라함 - 이삭을 지나 마침내 야곱에게 이어지게 될 것을 진심으로 고백한다(3-4). 이 흐름과 방향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라는 점을 주목하라. 아버지 이삭 역시 뒤늦게 야곱을 축복하고(),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 마침내 그를 축복하신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축복하는 자는 야곱이라는 게 들어났다(10-15). 흥미로운 것은 27장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스켄들에 대해서 일절 언급이 없다. 복은 주시는 것이지만, 그 전에 야곱의 잘잘못을 따지고 혼도 내시고 할 것 같은데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방향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의 마음과 방향에 서 있는 것이고, 야곱의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이자 역사하심이 핵심이다. 이를 야곱이 하나 둘 응답해 내는 분위기이다.

    

 

[방향3]

야곱의 기도(16-22)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 殿)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17b)

 

이제 이를 기도와 연결해서 살펴보자. 마침내 야곱은 이 방향 안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다. 이 기도의 무릎은 지금까지의 방향과 다르게, 그러니까 에서처럼 살다가, 혹은 삶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겨서, 복을 받고 싶어서, 기회가 왔다 싶은 나머지 넙죽 엎드린 것이 아니다. 야곱의 기도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향한 방향의 결정체(종합). 그래서 방향 1-2를 생각해 본 것이다.

그는 기도한다. 드디어 하나님 쪽으로, 하나님이 열어주신 바로 그 길을 따라 27장 이후에도 변함없이 살아가겠노라 선언한다. 이점은 에서와 다시 근본적으로 구분되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도망자가 되어 길 떠난 자신, 그는 혼자라 생각했고, 아버지 이삭과 모든 것을 뒤로하고 왔으니 그럼 무엇을 근거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야 할지 싶었을 야곱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잠이 든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바로 그 야곱을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비로소 이제야 야곱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지기(access) 시작한다. 이것이 벧엘이 갖는 의미이다. 지금껏 자신의 방식과 방법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 싶었는데 벧엘에서, 벧엘의 하나님께 다름 아닌 기도의 무릎을 꿇는다. 이는 무엇을 기도했느냐 보다 더 중요하다. 야곱이 다른 무엇보다 기도하는 것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제 하나님으로 살겠습니다.”

또한 야곱이 고백해 내는 기도를 보니 야곱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럼 누구 아들이고, 누구의 손자인가.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서원하여 기도한다. 드디어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에 주인이요 중심이 되는 순간이다. 이제 야곱은 이 고백을 따라 하나님 쪽으로 걸어갈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설명할 수 없고, 쓰여질 수 없는 야곱행전이다. 기도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알고, 믿고, 따르게 될 때 비로소 야곱이 그랬듯이 그는 무릎을 꿇는다. 이것이 기도다. 이 어찌 야곱의 일생만 그러하겠는가.

 

 

부스러기 묵상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3)

 

보통 우리는 급하고, 갈급하고, 다른 길이 없을 때 벧엘을 만든다.

사실이다. 그런 위급한 상황일 때에야 기도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의 필요와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벧엘을 통해, 즉 기도를 만들어서, 그리고 역시 자신이 정한 벧엘기도원을 통해 기도 앞에 선다. 어떤 일이 터지면 금식이 그렇고, 철야가 그렇고, 특별기도가 그렇고... 보통 여름이 끝나면 한국교회는 새벽기도하는 분들이 늘어난다. 왜 그런가. 바로 대학입시 철이어서다. 우리의 기대와 목표와 원하는 것이 이처럼 벧엘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오늘 야곱도 그럴만하다. 이제 혼자다. 아버지의 기도와 축복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형의 낯을 피해 도망자로 집을 나서는 위험한 피난길이다. 그런데 그런 그를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지금 이런 28장을 기대하고 벧엘의 하나님 앞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간 게 아니다. 우리처럼 위급하니까 기도하려고 벧엘로 간 게 아니다. 가는 길에 밤이 되었고, 그래서 그곳에서 돌을 베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야곱의 벧엘은 이렇게 주어진벧엘이다. 그런데 방향이 아브라함 이삭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방향으로 인생의 핸들을 잡고 있고, 이를 아브라함 이삭으로 이어지는 언약 백성의 대를 잇는 결혼이라는 방향으로 인생의 항해를 하려고 순종의 걸음을 내딛고 있는 때다.

야곱의 기도는 그 방향과 같은 방향이다. 그는 이 모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하심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이를 무엇으로 응답하는가? 그게 기도다. 정답으로 말하기는 쉬운데 야곱처럼 기도하기로 응답하고 방향읗 잡는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야곱의 기도에는 예배와 서원과 헌신과 감사와 충성서약이 들어있다.

하나님을 설득하고, 자기 소원을 아뢰고, 그래서 응답 받으려고, 무엇인가 또 필요해서 엎드린 것은 어쩌면 반쪽짜리 기도다. 그것은 하나님이 찾아오신 벧엘이 아니라 내가 필요에 의해 만든 벧엘이다. 이 경우에 벧엘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루는 것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내 뜻과 원하는 것을 구하고 찾는 응급처치용 응급실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반쪽기도.

이것은 내 욕심과 욕망을 기도를 통해 얻어내려는 종교적 행위에 가깝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계획을 알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고, 또 보았으니까 비로소 꿇은 무릎이다.

야곱은 기도하려고 벧엘에 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셨다. 그러니 방향이 이미 하나님 쪽으로 걷고 있는 야곱이 기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래서 기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래서 기도한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사람은 그래서 기도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맛본 사람은 그래서 기도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래서 기도한다.

이제 이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구하는 기도에서는 이 기도가 안 보인다.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방법인 기도에서도 이 기도는 안 보인다. 오직 응답만을 목표하고 기대하는 기도에서 이 기도는 늘 힘을 쓰지 못한다.

내가 만들어낸 벧엘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신 벧엘을 내게도 허락해 주시면 바로 거기서,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 가운데 몇 번은 바로 이 야곱의 벧엘 같은 우리의 벧엘 앞에 나를 세우신다. 지금이 그 때일 수 있다. 내게는 야곱처럼 이를 깨닫고, 알고, 그래서 반응할 수 있는 방향인가. 기도는 어느 날 해야지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삶의 전방향이 하나님 쪽이어야 한다. 삶의 무게 중심이 하나님이어야 지금 내가 선 곳이 하나님의 벧엘인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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