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vs 야곱: 장자권 이야기(창 25.19-34)

20200207(묵상)

  

 

 

에서 vs 야곱: 장자권 이야기

Gen. 25.19-34

  

   본문 관찰

 

   갈등1: 에서와 야곱의 출생과 관련하여(19-26)

   갈등2: 장자권 이동과 관련하여(27-34)

 

      [구조] 야곱 이야기(25.19-35.29)

      가나안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25.19-28.22)

      가나안 밖에서 일어난 사건들(29.1-31.55)

      가나안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32.1-35.29)

   

 

명가행전: 이삭 에서 vs 야곱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22a)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b)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31)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34b)

 

이삭은 40(아버지 아브라함이 140)에 결혼하여 그의 나이 60(아버지 아브라함이 160)에 비로소 아들들(에서와 야곱)을 낳는다(20,26).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으니까(7) 에서와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생존해 있을 때 태어나 15년을 함께 믿음의 명가(名家)를 이루며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창세기의 독자들이 놀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는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12-18)을 비롯해서 후처 그두라가 낳은 여러 아들들이 있었다는 점이다(1-4).

그럼에도 명가의 후손은 이삭이다(5,11,19). 이는 아버지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더 분명하게 정확한 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다(11). 이삭에게는 이복 형(이스마엘)과 이복 동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또 어찌 보면 이삭은 장자가 아니다. 이렇듯 생육법에 의해 장자가 자동적으로 복을 이어받는 것은 창세기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넘어가는 이야기의 보이지 않는 핵심 중 하나였다면, 이제 이삭에서 에서와 야곱으로 넘어가는 이야기는 이것이 전면에 등장하는 핵심으로 부상한다. 과연 족장의 역사의 주도권은 누가, 어떻게, 무엇을 통해 이를 얻게 될 것인가?

정리하면,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렇고 이삭에서 야곱으로 넘어가는 것 역시 이삭이나 야곱의 노력이나 땀이나 수고에 의해서 된 게 아니다. 이 점은 특별하기도 하고 특이하기도 하다. 하나님의 하시는 놀라운 방식이다.

   

 

부모: 이삭과 리브가

 

   이삭 여호와께 간구하매(21)

   리브가 여호와께 묻자온대(22)

 

이삭과 리브가는 결혼 후 20년이나 불임부부(不姙夫婦). 이를 놓고 이삭이 한 일은 다름 아닌 기도다: “여호와께 간구하매”(21a) 이때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21b). 그런데 문제는 리브가의 태중에 쌍태(雙胎)의 기미가 있고, 더욱 태중에서 이 둘이 싸운다. , 이때 리브가의 반응을 역시 창세기 기자는 놓치지 않는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22)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과 기도의 부부를 만난다. 시집을 온 후 20년만에 리브가가 보인 반응은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다. 그녀는 시어머니 사라처럼 자신의 여종을 씨받이로 이삭에게로 안내하지 않는다. 당면한 문제 앞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당당하게 구한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175세라.”(7)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60세이었더라.”(26b)

 

, 다시 시아버지 아브라함의 생애와 연결하여 정리를 해 보자.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들어올 때가 그의 나이 75세다(12.4). 그리고 아들 이삭이 100세에 태어나고(17.17,21, 18.14, 21.5), 아들이 40세에 장가를 가니까(20) 그의 며느리 리브가가 살던 아브라함의 고향(친척과 아비 집)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역시 65년만이다(24). 그런데 65년이라는 베일에 가린 역사의 커튼을 열어보니 그곳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놀랍게도 리브가는 이런 일련의 흐름에서 하나님 쪽으로 자신의 인생을 승부한다. 그러고도 20년이 지난 때가 오늘 본문이다.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리브가를 본다. 이것이 리브가가 보여주는 일상생활의 영성이다. 내게도 이런 평범하지만 가장 강렬한 그분을 향한 질문이 있어야 한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22b) 참으로 놀라우리만큼 성숙한 부부(이삭과 리브가)와 가정의 모습을 본다. 삶에서 일어나는 세미한 문제까지도 하나님을 만나는 질문으로 이끌 수 있는 평범함,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앵글이 아름답기만 하다.

   

 

자식: 에서와 야곱

 

   에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34)

   야곱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31)

 

이런 부모에게서 태어나 장성했으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여과 없이 창세기의 앵글에 잡힌다. 형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이기고 있고, 동생은 그것을 어떻게든 자기 몫으로 만들기 위해 값을 지불하고 있다. 언뜻 보면 이 두 사람의 운명이 장자의 명분으로 그려지고 있는 붉은 것’(팥죽, 30a,34a)이 바뀌는 것에서부터, 그러니까 이런 일련의 게임(거래, 옵션)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모는 기도의 기도를 거듭하면서 자식을 낳아 길렀지만 아들들은 부모가 보여준 기도의 영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급기야 심각한 어떤 결정이 두 아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문제는 인위적이다. 이미 이들에게는 수태고지(23)라는 거스를 수 없는 섭리의 길이 놓여있다. 그런데 장남 에서는 이것을 가볍게 여기고 있고, 차남 야곱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것을 쟁취하겠다는 식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가 아닌 자신들의 결정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쥐락펴락하겠다는, 그럴 수 있다는 야망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이것은 창세기 기자의 관점과는 정면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항명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에 에서는 물론이고 야곱까지 덩달아 춤을 추고 있는 꼴이다. 하나님을 무시한 인생행로의 여정, 하나님 없이도 버리고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장한 자만과 교만,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음에도 어떻게든 자기 식대로 인생을 결정해 가겠다는 불순종의 씨앗이 약속의 가문의 중심부에서 발아되고 있음이다. 다시 창세기는 숨 가픈 소용돌이 속으로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부스러기 묵상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b)

 

아주 묘하고도 묘한 두 그림이 절묘하게 25장을 지탱하고 있다.

창세기 기자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이전에 수태고지를 통해 저들의 일생을 놀랍게도 공개해 버린다(23). 이런 것을 두고 아마 천기를 누설했다고 해야 할까. 저들의 인생이 세상 역사에 등장하기도 전에 저들의 인생의 끝이 희미하게나마 예고되는 게 말이다. 이것이 태어나(24-26), 그리고 장성하여(27a) 가는 에서와 야곱에게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이 예언은 다음 몇 가지 의미를 독자들에게 교훈한다. 먼저, 야곱의 일생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신의 수완(, 트릭, 거짓말, 처세술, 지략)을 의지해서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야곱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삼류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천박스런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 역시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31-34)을 빼앗아 옴으로써 뭔가 대역전의 전기를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언과 야곱의 행동 사이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생애를 이처럼 소개하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b)는 말씀처럼 야곱의 생애를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심을 분명히 하신다. 이것이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주어진 수태고지 예언이 갖는 절묘한 위치다. 결국 야곱의 야곱됨은 하나님 밖에서 야곱의 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한편 에서는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동생에게 가 있는 축복의 저울추를 어찌해 볼 수 없는 형편이요 입장이다. 그럼에도 그는 장자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축복마저도 관심이 없다. 아니 가볍게 여긴다. 그가 후에 동생에게 선포된 축복을 알고서 방성대곡한 장면을 보면 그 역시도 하나님이 아버지를 통해서 그 자식들을 축복하시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배고픔이라는 지극히 육신적인 일 때문에 축복이라는 위대한 영적인 것에 눈 멀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는 사냥을 할 만 한 나이로 성장(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적인 세계는 성인아이처럼 성장이 멈추어 있는 듯하다.

부모는 기도의 호흡을 따라 자식을 잉태하고 양육하였지만 자식 중 하나(야곱)장자의 명분까지라도 어떻게 해서든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고, 또 다른 자식 하나(에서)는 지금 자신이 가볍게 여기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 분명 위기다. 아직은 이 솜털만 한 나비의 조그만 날개가 만들어낸 바람이 어떤 반향을 일으키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어떻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b)는 거역할 수 없는 섭리를 따라 창세기의 역사가 흐를 것이라는 것 외에는 말이다.

숨 막히는 탐색전이 이제 막 끝났다. 허기진 배는 팥죽으로 해결되었다. 장자의 명분을 자신의 통장에 입금시키는 것은 성공했다. 둘 다 자신들이 원하는 걸 손에 넣은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독배(毒杯)가 될지 성배(聖杯)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이것이 야곱과 에서의 생애에서 주목하는 23절의 절묘함이다. 한편 부모 이삭과 리브가, 아들 에서와 야곱, 이렇게 네 사람 가운데 오직 하나 에서만 다른 방향이다. 그는 장자의 명분에 별 관심이 없다. 하나님 쪽으로 걷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두고두고 여운이 남는 절묘하고도 놀라운 말씀과의 빗나감이다. 이렇게 에서는 점점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으로부터 빗나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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