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⑨ - 흑 암(출 10.21-29)

20210423(묵상)

  

 

 

재앙- 흑 암

Ex. 10.21-29

 

    본문 관찰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흑암 vs 광명

 

아홉번째 흑암 재앙은 예고 없이 임한다.

이런 경우는 삼 배수를 따라 이번이 세번째다(21, 8.16, 9.7). 그리고 네번째 파리 재앙부터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구도가 이번에도 역시 그대로 적용된다. 애굽 온 천지가 3일이나 어둠 속에 있는 반면, 이스라엘이 사는 곳은 광명이 있었다(22-23). 사실 태양신(Ra)은 애굽의 주신(主神)이다. 그리고 바로는 그의 아들로 추앙하던 때였다. 그런데 지금 전능하다고 믿어온 태양신이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에게 맥을 추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애굽이 술렁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P-point(24,27-28)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24)

 

바로(Pharaoh)는 태양신(Ra)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무능력한가를 깨달아야 했다. 애굽의 자랑이 아무 것도 아닌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애굽을 덮은 흑암을 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뒤덮고 있는 영적(靈的) 흑암은 보지 못했다. 그랬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할 수 만 있다면 자기 것을 지키려는 불의한 소유욕과 과도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죄다. 때문에 이 죄는 심판을 받는다.

그는 위기의 파도가 일어나기만 하면 일단 그것만을 모면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목적을 두고 타협을 서두른다(24). 벌써 네 번째다(8.25,28, 10.8-11,24). 여기에는 속사람의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겉모양만을 그럴듯한 종교인다운 말로 포장하여 당면한 재앙이라는 위기만을 피해 보려고 하는 사악함이 들어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거침없이 타협을 하려는 바로에게서 사탄의 희미한 그림자를 본다.

한편 바로가 제시한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24)라는 타협안에는 사탄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계략이 들어있다. 어떻게 해서든 애굽과 이스라엘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그것을 이용하여 다시 역습을 노리겠다는 포석이다. 여기에 소와 양을 이용하여 애굽에 조금이라도 미련을 갖게 만들려고 하듯 사탄은 지금도 뭔가 세상의 파편들을 내게도 남겨두고 싶어한다.

과연 나에게는 그것이 뭘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바로가 이스라엘의 우양(牛羊)을 이용하려 했듯이 사탄은 나의 무엇을 이용하려 들까. 내가 아직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무엇의 롯의 아내처럼 세상을 향해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가. 애굽이라는 구원에 감격한 나머지 우양(牛羊) 정도야 하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화근과 올무는 아예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12.30). 이게 살길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드리어 내가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9)

 

그러니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데 필요한 것들을 세상에 남겨두라는 바로(사탄)의 유혹이 얼마나 위험천만(危險千萬)한 노림수인가. 어떻게든 세상과 접속을 해야 다시 자기 휘하로 예속시킬 수 있을 테니까. 바로는 생각보다 지능적이고 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아무래도 나의 조급함이라는 병이 마음에 걸린다. 종종 하나님보다 앞서 슬그머니 결정해 버리고 싶고, 미래를 소급해서 오늘이라는 틀 속에 교묘하게 담아내고 싶고, “기다리라!”는 사인을 받았음에도 그 시간 속에 담아야 할 내용보다는 어서 빨리 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조바심 내고 있는 것으로 소중한 시간들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M-point(21-23,25-26,29)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26a)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11.27)

 

모세(Moses)의 탁월한 영성이 흑암의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난다. 그는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바로가 제시한 타협을 거부한다(25-26). 아마도 바로 안에 일하는 사탄의 전략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마음대로, 혹은 바로(사람) 때문에 고무줄처럼 이랬다저랬다 할 수는 없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인(sign)을 받아 그대로 전달하고, 그래서 그것이 성취되게 하는 것까지가 그의 소임이다. 그는 이 부분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절제한다. 역시 지도자다운 모습이다.

좀 더 영적으로 들어가 보면, 모세는 애굽의 은혜를 모두가 다 누리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을 하나의 공동체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가 중간에서 자기 마음대로 이 은혜의 선물을 받고 받지 않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 애굽을 위해 일하는 맡은 자일뿐이다. 모세가 자기 능력과 계획을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을 위해 쓰여져야 할 하나님의 소유다.

그랬기에 모세는 지금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26a)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부를 요구하시는 분이시다. 이를 위해 인간은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할 권리가 전혀 없다. 모세가 이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감히 바로가 자기 마음대로 이러쿵저러쿵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26b)

   

 

부스러기 묵상

 

마침내 죽음의 그림자가 애굽을 뒤덮기 시작한다.

바로와 모세는 이제 서로 완전 결별을 선언한다(28-29). 흑암이 지나고 다시 밝은 날이 오면 애굽은 3일 전이라는 정상적인 삶의 리듬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마치 암() 환자가 일시적으로 좋아지는 것 같은 호전반응이 오면 곧바로 돌이킬 수 없는 수순을 밟게 되는 것처럼 지금의 빛이 곧 어둠의 전조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듯 애굽은 지금 깊은 영적 잠을 자고 있다. 아무도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 있는 광명을 자신들에게 옮겨올 수 없다. 아마도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고센과 경계를 두고 살았던 애굽 사람들의 두려움은 더 컸을 것이다. 그들은 빛과 어둠 사이에 서서 자신들은 어둠이고, 이스라엘은 빛이라는 것을 물끄러미 구경할 수 밖에 없는 처지임을 절감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적 무능을 보았을 것이다.

애굽의 정신적 좌절과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삶의 전 영역이 어느 것 하나 온전치 못한 상황이다. 환경(재앙) 재산(재앙) 신체(재앙) 정신(재앙)으로 이어지는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은 재앙의 파도 앞에 애굽은 껍질 밖에 남지 않았다. 이로써 국가부도(國家不渡, 15) 일보 직전이다. 그럼에도 모든 게 다 깜깜할 뿐이다(23a). 애굽은 깊이 잠들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순간만을 어떻게든 모면해 보려는 바로(P-point)와는 다른, 완전한 승리를 위해 조그마한 것에 연연하지 않는 모세(M-point)가 어둠 속에서도 식별이 가능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영적인 세계는 육안으로만 보는 세상이 아니다. 언제나 그것을 뛰어 넘어 하늘의 세계,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한다. 이 점에 있어 결코 흔들림을 용납하지 않는 모세에게서 상황이라는 변수 앞에 늘 무기력한 나의 연약함을 부끄럽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바로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27-29). 거의 1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이나 하나님은 바로에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기회를 주셨다. 쉴 틈 없는 말씀으로, 무수한 기적(재앙)으로,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사는 곳의 평안함으로, 자신의 신하들의 입을 통해서, 초토화된 애굽을 보게 하는 것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며 무기력한가를 경험케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알리셨다.

바로를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를 생생하게 만나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때를 놓아버리는 인간, 이게 바로의 초상화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부족하고 약해서가 아니다. 문제는 바로에게 있다. 그는 하나님이 내민 손을 붙잡고 싶지 않아 했고, 그것만큼 자기 방식대로 살고 싶어했다. 하지만 유한한 인생이 자기 것으로 견딜 수 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완전하지도 않다. 바로는 이런 진리를 몰랐던 것이다. 아니 거부한 것이다. 패망하고 있는 대도 그걸 알지 못하는 바로, 이게 자꾸 이 세상과 겹치는 이유는 또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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