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②③ - 개구리와 이(출 8.1-19)

20210418(묵상)

  

 

 

재앙②③ - 개구리와 이

Ex. 8.1-19

 

    본문 관찰

 

    둘째 재앙 - 개구리(1-15)

    셋째 재앙 - (16-19)

   

 

내가 여호와임을 알리라!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12.12b)

 

열 재앙(7.14-11.10)은 애굽의 인조신(人造神)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공격이다.

둘째 재앙에서 바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인정하고(8,10), 셋째 재앙에서 바로의 술객들은 재앙의 주도권을 하나님께서 쥐고 계심을 시인한다(19). 마침내 애굽의 신들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바로의 변덕스러움은 좀처럼 변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15,19).

한편 둘째와 셋째 재앙 역시 애굽 온 지경(, 2,17)에 미쳤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 재앙들의 여파가 그대로 전달되었을 것이다(22). 이를 경험하는 것이 비록 힘들고 어렵긴 했어도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시고 계심을 생생하게 목도하였다. 애굽 온 땅의 물이 ’(7.14-25)로 변하고, ‘개구리’(1-15)로 덮이고, (모기, 16-19)의 습격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지금 목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이보다 더 확실한 교과서가 또 있었을까.

   

 

둘째 재앙 - 개구리(1-15)

바로읽어내기

 

바로는 7일 동안이나 뜨거운 맛을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고집불통(固執不通, 7.22)이다. 나일강이 죽어가고,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개구리가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란, 다시 말하면 자신들이 신이라 숭배하는 것이 오히려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 주는 것을 인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다름 아닌 노예들에게, 그리고 그 노예들의 하나님(‘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 7.16)이란 분에게 속수무책인 것이 바로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일그러지게 했다.

그럼에도 바로는 이미 승산이 없는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 이처럼 세상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싶어하지를 않는다. 바로는 이를 부인하고 싶어서 이번에도 요술사들을 동원하여 모세를 흉내낸다(7). 하지만 모세처럼 개구리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 아닌가(3,6,7).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장면(happening)이 아닐 수 없다.

바로의 추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한다: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8a) 그뿐이 아니다. 모세의 요구를 수용한다: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8b) 살아있는 신이 노예들에게 무릎을 꿇는다. 참으로 놀랍고 멋진 역전이 아닌가. 앞서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5.2)라고 냉소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비록 잠시 후에 손바닥 뒤집듯 다시 거짓말을 하고 말지만(15), 어떻든 간에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신세로 몰락한다.

이때 모세의 재치가 빛난다. 모세는 개구리가 장소(“나일강에만 있도록”, 9)는 물론, 그리고 시간까지 내일로 예약을 함으로써(10a) 이 재앙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닌 시작과 마무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분명히 공포한다: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10) 그렇다. 이것이 모세가 개구리를 떠나게 하는 목적이다. 그는 이것 역시 하나님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을 뿐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로 만드는 도적질에 가담치 않는다. 이것이 바로와 모세의 차이다.

한편 바로의 약속은 곧 거짓말로 바뀐다(8 15). 상황이 변하면 언행이 달라지는 것은 전형적인 악인의 수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는 악인의 모델이다. 급하면 하나님 찾고, 기도하고, 또 기도도 부탁하고(“여호와께 구하여”,8a), 기독교를 마치 평생보장보험에 가입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종교생활을 하는 것 같다가도 상황이 호전되고 풀리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바로와 다를 게 없다. 얼마나 많은 바로 풍의 재방송들이 난무하는지 모른다.

 

 

셋째 재앙 - (16-19)

 

한편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17) 사람들과 짐승을 괴롭히는 셋째 재앙은 경고 없이 곧바로 집행된다. 특별한 것은 전초전에 해당하는 기적(7.8-13)과 첫째와 둘째 재앙에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일에 일조했던 요술사들(7.22, 8.7)도 이제는 더 이상 술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18). 마침내 요술사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한다. 저들은 재앙을 일으키는 실체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시인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19a)

하지만 이런 변화가 특별하지 않는 것은 마귀가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고 입으로 시인했다고 해서 그가 회심한 것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으로 가실 때 귀신 들린 자 둘이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8.29)라고 소리 질렀던 것과 지금 애굽의 요술사들의 말은 같을 뿐이다. 또한 성탄절에 조계사 입구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현수막(placard)이 걸렸다고 해서 불교(佛敎)가 달라졌다거나 회개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짜 스스로가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인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세상에는 이 정도의 감각조차도 잃어버린 사람들로 가득차 있기에 그렇다. 사람들은 흔히 기적이 일어나면 예수님을 믿을텐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가. 그래도 저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15.14)라고 소리질렀다.

믿음은 기적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그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기적도 믿을 수 없고, 기적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금 바로와 그의 요술사들이 그러하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 바로 그 현장에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게 바로시대나 우리시대나 할 것 없이 언제나 만나게 되는 사람 사는 곳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기적 앞에서 바로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부스러기 묵상

 

    “모세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12b-13a)

 

그럼에도 바로에게 내리신 재앙, 곧 개구리를 없애 달라고 기도한다.

바로가 기도의 대상이라는 점이 놀랍다. 그의 영혼이 불쌍해서 였을까. 아니면 그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는 애굽 온 땅과 백성들 때문이였을까. 어떻든 모세는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 개구리 재앙을 내리신 것이 아니기에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10)는 재앙의 목적이 이루어진 만큼 하나님의 자비는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바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옳으냐고 시비하는 것보다는 바로이기에 기도해야 되지 않을까. 그처럼 불행한 영혼이 또 있을까 싶다. 하나님의 기적을 목도하면서도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 이것이 죄인 아닌가. 흔히들 기적을 보여준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바로를 통해서 볼 때 꼭 그럴 것 같지만은 않다. 같은 의미로 예수시대의 기적을 목도했던 수많은 무리들은 다 어딜 갔는지 모를 일이다.

기도를 해 줄 필요가 없는 대상은 없다. 바로마저도 기도의 대상으로 품을 수 있는 모세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훨씬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죄는 미워도 죄인은 기도의 대상이요, 구원의 대상이요, 그 역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겠다.

어떻게 하면 바로스러운 변덕스러움이라는 병을 이길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이런 바로의 못된 기질이 없다고는 할 수 없기에 좀 씁쓸한 게 사실이다. 바로를 향해 돌을 들었다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다할지라도 우리의 이러한 속성을 아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다고 바로에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 할 수도 없는 처지라는 점이 참으로 곤혹스럽다. 신앙의 삶이라는 질()이 초지일관할 수 있기를, 날마다 일상생활의 영성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자신을 이기고 죄를 이기며 정욕과 사탄을 이기며 살 수 있기를 더 없이 소망하는 말씀이다.

 

    

제목 날짜
재앙⑩, 그리고 출애굽.EXODUS(출 12.29-51) 2021.04.22
첫번째 유월절.逾越節(출 12.1-28) 2021.04.22
마지막 재앙, 그 예고편(출 11.1-10) 2021.04.22
재앙⑨ - 흑 암(출 10.21-29) 2021.04.21
재앙⑧ - 메뚜기(출 10.1-20) 2021.04.19
재앙⑦ - 우 박(출 9.13-35) 2021.04.17
재앙⑤⑥ - 악질과 독종(출 9.1-12) 2021.04.17
재앙④ - 파 리(출 8.20-32) 2021.04.08
재앙②③ - 개구리와 이(출 8.1-19) 2021.04.08
재앙① - 피(출 7.8-25) 2021.04.06
하프타임.HalfTime(출 6.28-7.7) 2021.04.06
레위지파 이야기(출 6.14-27) 2021.04.06
언약(言約)이 해법이다(출 6.1-13). 2021.04.06
첫 탐색전 - 모세 vs 바로(출 5.1-23) 2021.04.05
入애굽 길목에서 생긴 일들(출 4.18-31) 2021.04.03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2(출 4.1-17) 2021.04.03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1(출 3.11-22) 2021.04.03
소명(召命)에로의 부르심(출 3.1-12) 2021.04.03
모 세 - 80년 이야기(출 2.1-25) 2021.04.01
이스라엘 - 350년 애굽史(출 1.1-22) 2021.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