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곧 기회다(출 14.1-14)

20210429(묵상)

  

 

 

위기는 곧 기회다.

Ex. 14.1-14

 

    본문 관찰

 

    다시 강퍅해진 바로(1-9)

    흔들리는 이스라엘(10-12)

    모세의 설교(13-14)

  

 

자중지란(自中之亂)

 

신앙은 위기의 때에 그 진가(眞價)가 나타나곤 한다.

지금 이스라엘(모세)가 그렇다. 평생 연습만 하려고 운동하는 프로선수는 없다. 연습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실전에만 나서면 맥을 못 추는 선수들이 종종 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많다. 평안할 때, 문제가 없을 때는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떤 문제 앞에 서는 것을 보면 영 아니다 싶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특별히 자녀들을 결혼시키는 부모들을 볼 때 그렇다. 말은 믿음 좋은 청년(자매)이면 됩니다!”라고 하는데, 실상은 그것이 아니다. 믿음은 액세서리고 진짜는 다른 것을 요구한다.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만난다.

학생 때는, 미혼 때는 신앙이 좋은 것 같은데, 졸업만 하면, 결혼만 하면 영 아닌 경우도 그렇다. 무엇보다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는 좋은데 막상 현실의 생활로 돌아가면 영 아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대단한데 집에만 가면 돌변한다. 그래서 집사님으로는 참 좋은데 엄마로는 아니야!”라고 판단 받는 부모들이 많은 것 또한 그렇다.

보다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세, 그리고 애굽의 군사들이 모두가 보았다. 동일한 사건 속에서, 또한 동일한 으로 보았는데, 문제는 그 본 것이 너무너무 서로 달랐다. 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10)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모습을 본다. 두려움 기도 불평이라는 하나의 습관적인 공식을 만들어 낸다. 기도까지는 참으로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신앙이다. 그러나 기도 이후는 철저한 실패였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도 있나 싶다.

심히 두려워하여”(10b), 이것은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시련(문제, 환란, 고난)을 만날 때 이처럼 반응을 보일 때가 많다. 가장 먼저 대면하는 것은 이러한 두려움이다. 사탄은 언제나 이 두려움을 통해 기선을 제압한다.

불신앙은 이처럼 두려움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는 하나님과 믿음이 흔들린다는 증거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짖게 되자 하나님이 두려워졌다. 그리하여 동산 나무 숲에 숨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게 다 죄 때문이다. 이처럼 죄는 두려워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실패의 미궁으로 몰아간다.

그런데 이 문제를 여호와께 부르짖고”(10b),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이어간다. 지금 앞은 홍해요, 뒤는 애굽의 군사들이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요 인간의 한계상황(限界狀況)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밀려오는 두려움을 기도로 물리치고자 하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은 가히 대단한 신앙이다. 이러한 위기를 만날 때 이스라엘처럼 기도가 생각나고, 그래서 기도할 수 있어야겠다.

두려운 마음을 기도로 어느 정도 물리친 줄 알았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11-12)로 이어지는 기도 이후가 더 문제였다. 이들은 기도는 했지만, 그러나 그 기도대로 믿는 믿음에서는 실패하고 만다. 기도 그 뒤를 불평으로 잇고 있어서다. 기도 그 이후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나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걸 깨닫는다.

   

 

애굽 사람들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5)

 

애굽과 바로는 이렇게 말하며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뒤를 따라왔을지 모른다: “애굽은 너희 발로 걸어 나갔지만 이제 질질 끌려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렇듯 세상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하며, 비꼬며, 깔본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죄악인지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이 세상의 지배를 받아 살아가던 네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구원으로 나아갔다지만, 이제 다시 너희들은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

사탄은 이렇듯 언제나 죄와 죽음과, 불평과 부정적 사고방식의 노예가 되도록 요구한다. 결국은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항하고 불순종하게 만든다. 그는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여 죄 아래 빠지도록 유혹한다.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깔보며,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처럼 죄와 이 세상 풍속의 노예로 살아가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와 같은 형편을 당했던 적은 없었다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저들만 멸망 당한다. 까불면 까불수록 저들의 멸망은 점점 임박해진다. 세상이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그들이 이스라엘(그리스도인들, )과 교회를 핍박하면 그럴수록 그들은 스스로 종말을 자초하고 있을 뿐이다.

 

 

모 세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

 

하나님은 모세의 눈을 열어 보이셨다. 따라서 그는 바로와 그 군대만을 보지 않았다. 그 배후에서 역사 하시며, 이스라엘을 도우시며,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신앙의 능력이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3a) 하지만 애굽의 군사만을 보면 이처럼 절망하게 된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세상의 세력을 멸하신다: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b) 그러므로 애굽, 그러니까 세상(문제, 시련, 환란, 위기)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것들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도록 이끄신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때로 가만히, 조용히 있는 것 자체가 신앙일 때가 많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한다. 문제 앞에 정신없이 떨다가는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를 빼앗을 우려가 있다. 또한 그러다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 보다 앞서는 것은 불신앙이다.

생각해 보면, 지난 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말 할 수 없는 수 많은 기적들을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보면 내가 정신 없이 뛰고, 막고, 해결하고, 처리한 것 같은데 아니었다. 하나님이 다 이루어 주셨다. 그럼에도 이 기적 같은 사실을 나중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신 기적의 부스러기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가만히 있을지니라!” 아멘이다. 정말이다. 가만히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보라!’ 하신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홍해와 애굽의 군사들을 멸하시는가를! 하나님께서 우리네 인생행로를 어떻게, 무엇으로 인도해 가시는가를! 그러니 하루 하루가 기적 아닌가. 순간 순간이 다 기적이다. 모세처럼 하나님을 보고,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고, 또한 적()을 보며 살고 싶다. 진심이다.

   

 

부스러기 묵상

 

출애굽은 했으나 그것을 감당할 믿음은 아직 없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구원은 받았으나 그 구원 안에서 누려야 할 풍성한 삶은 아직 없었다. 이게 핵심이다. 문제에 봉착하자 자연스럽게 옛 성품(생각, 행동)이 그대로 나타났다. 예수는 믿었으나 여전히 세상 방정식대로 살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고, 그럴 때 심각한 갈등을 느낀다. 평안할 때는 그저 그런대로 믿으며 살아가는 것 같은데 앞은 홍해요 뒤는 애굽의 군사들인 시련(환란, 고난)을 만날 때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여야 하는데 반대로 예수님은 간 곳 없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가고 싶어하는 흔들리는 것을 어찌하랴

하나님은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신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3a,14)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자신을 보면 실망스럽고 포기하고 싶다가도 하나님이 언제나 나의 수준과 못남과 상관없이 당신의 자비함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용납해 주실 때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된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랴. 그게 쌓여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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