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복(福)받기(창 9.1-7)

20200111(묵상)

  

 

 

노아, ()받기

Gen. 9.1-7

  

   본문 관찰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6.13)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7.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1)

 

세상(인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주어진 [문화명령](1.26-30)이 에덴동산에서 실현되던 어느 날 아담은 하나님의 금지명령(2.16-17)을 어김으로써 타락한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 안에는 죄의 소원과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발동되게 되었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반드시 죽으리라!”(2.17)는 말씀이 죄에 대한 보응으로 성취되고 만다. 이때부터 세상은 가인의 후예와 셋의 후예들로 나누이면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6.5) 하나님은 정확하게 보고 계셨다.

이로써 홍수심판이 왔고, 마침내 세상에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 과연 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 방주에서 나온 새로운 인류의 서장을 여는 노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과연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인류(노아) 앞에 나타나실까. 여러모로 궁금하다. 또한 홍수심판 이후에 처음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임재하심 앞에 서는 노아와 그의 식구들의 모습이 그렇다.

   

 

새 문화명령(1)

체식 & 육식(2-7)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8.17b)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b)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3-4)

 

   하나님은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실 때 저들에게서 이루고 싶으셨던 문화명령을 어찌된 일인지 다시 말씀하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b, 1.26-30) 하나님은 아담과 그러했듯이 이번에는 노아와 더불어 새시대를 열고 싶어 하신다. 아니, 지난 1,657이라는 세월 동안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비록 당신의 섭리를 거스르면서까지 죄악의 씨앗을 세상 속에 심어갔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인류) 안에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은 불변하다 말씀하신다.

죄를 몰랐던 완전한 아담도 실패한 일을 과연 노아가 성공해 줄까. 세상은 이미 변하는 것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시다. 때문에 변하는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노아에게 이처럼 말씀하실까. 만일 하나님께서 다시금 완전한 새로움을 원하셨다면 노아가 아니라 홍수심판을 통해 인류를 쓸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통해 역사를 다시 시작하셨어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노아와 말씀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세상(인류)은 변하는 것임을,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다시금 새로운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변하는 세상 안에서 살지만 단 하나, ‘와 연결된 죄의 악순환(보복, 심판)은 금하셨다(5-6).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이루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타락한 인간의 기준에 따른 피와 함께 그것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신 셈이다.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17.14)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24.17)

 

하나님이 왜 육식을 허용하시면서도 그것의 피를 먹지 말 것을, 특별히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5b-6a)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식생활 개선이 아니다. , 지금까지는 채식을 하다가 홍수 후 식물이 부족하니까 임시방편(한시적)으로 육식을 허용하신 것 또한 아니다.

인간이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체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때문에 육식을 이제야 명하고 있다면 에덴에서부터 육식이 허용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당신의 뜻을 성취하는 일에 있어 생명의 피까지 흘려가면서, 그것도 인간의 기준과 의지를 따라 문화명령을 성취해야 한다면 목적을 위해 수간이 정당화되는, 그리하여 인간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어드리는 꼴이 되고 만다.

아마도 하나님은 비록 타락한 아담일지라도 그에 의해서 문화명령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아벨의 죽음이 몰고 온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순간을 잊지 않고 계셨던 것 같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면서까지 그가 추구하려 했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에 반하는 것이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없이 하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세상 안에 관철시키는 죄인임을 하나님은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 이후에도 이처럼 피의 악순환을 통해 당신의 계획이 인간화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6)

 

노아 이후부터 인간은 체식에다 육식을 겸하기 시작한다(3).

어떻든 식생활의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먹을 수 있는 위해 농사를 지었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가인은 실패했다. 그러나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양을 치는 아벨은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로 보건데 아벨은 이미 식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제사)하는 일에 동물(, )을 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양을 치면서도 그것을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지금 노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채소처럼 사람의 식물로 동물 식사를 허용하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것과 사람이 생존을 위해 먹는 것 사이의 담을 헐어버리신 것은 아니다. 육식을 함에도 불구하고 피(생명)가 경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며,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자의적으로 흘리게 하는 일은 엄격하게 금하신다. 이것이 문화명령이 실현되는 세상이 바르게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에게 요구된 하나님의 뜻이다.

한편 에 대한 말씀은 모세시대에 이르러 보다 분명하게 신학화(神學化) 된다(17.10-16, 24.17-23). 그리고 이는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연결되면서 계시가 완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계시의 점진적 발전을 아직은 하나의 씨앗에 불과한 노아시대에 그대로 대입시키기에는 좀 자신이 없다. 이러한 성경신학적인 통일성을 모르는 척 하고자 함이 아니라 과연 노아시대 사람들이 이러한 것까지를 알았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생명의 피를 마음대로 흘리면서까지 인간이 식생활을 하게 되면, 생명이 죽고 또 죽이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사소한 일쯤으로 치부되면서 가인처럼(4.8), 가인의 후손인 라멕처럼(4.23)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붙였다 떼었다 하는 피흘림의 악순환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다. 사실 반드시 죽으리라!”(2.17)에서, 그리고 홍수심판에서 알 수 있듯이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유일한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성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급기야 인간의 생명까지도 인간의 결정과 선택에 따라 이러쿵저러쿵 하게 되면 세상이 질서 있게 서는 일은 여지없이 혼돈에 휩싸이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비록 죄로 타락한 세상일지라도 이런 인본주의적인 약육강식의 논리가 당신의 섭리가 펼쳐지는 세상에서, 특별히 사람들 안에서 반복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아담의 때나, 노아의 때나, 그리고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면서 거룩한 당신의 이름과 영광이 결국은 성취되는 세상을 꿈꾸시고 계신다. 이것이 단순히 의식주(衣食住)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보다 더 근원적이고 거시적인 목적에 의해 생명의 피를 먹거나 흘리게 하는 일을 금하신 이유가 아닌가 싶다. 마치 모든 것이 다 허용(자유)되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일은 금하셨듯이,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성취해야 할 땅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이룸에 있어서 피흘림이라는 인본(강자)의 논리를 따르는 것을 금하심으로써 문화명령이 단순히 세상 속에 사람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게 하셨다.

노아와 그의 식구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아담이 그랬듯이 단 하나의 금지명령 앞에 서 있다. 홍수심판 이후의 세상을 다시금 혼돈 속으로 몰아넣는 주범은 다름 아닌 가인의 죄()라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죄로 타락했으나 여전히 당신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된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본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6b)

하나님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피를 소중하게 여기셨다는 쪽보다는 이미 여자의 후손’(3.15)의 피흘림을 통해 인류의 죄를 해결하실 것을 계획하고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분은 이미 타락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실 때부터 피가 뜻하는 것이 무엇임을 아셨다(3.21). 그랬기에 이것에 반한 피를 흘린 가인과 그 후예들은 모두가 다 홍수심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신약(新約)을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서 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적 의미의 피흘림’(살인)은 단지 코에 있는 호흡을 멈추게 하는 것만이 아닌 그 이상의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산상수훈을 통해 선포된 주님의 말씀이 이 부분을 완전케 한다(5.21-26,38-42). 가깝게는 형제와의 화목은 물론이고(5.24), 멀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것(5.39)이 꽃피워진 세상을 이루는 것까지가 내게 주어진 피흘림(살인)을 금하신 하나님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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