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방주짓기(창 6.9-22)

20200108(묵상)

  

 

 

노아, 방주짓기

Gen. 6.9-22

  

   본문 관찰

 

   노 아(9-13,22)

     의인이요 당대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노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방 주(14-21)

     너는 방주를 만들되 3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구조2] 노아홍수 이야기(6.9-9.29)

       A 노아와 땅(6.9-12) 

         B 하나님의 말씀과 노아의 반응(6.13-7.10): 방주에 들어가라!

           C 물의 넘침(7.11-24)

             X 하나님이 기억하사”(8.1a)

           C’ 물의 감함(8.1b-14)

         B’ 하나님의 말씀과 노아의 반응(8.15-9.17): 방주에서 나오라!

       A’ 노아와 땅(9.18-19)

 

       홍수, 그 이후 이야기(9.20-29)

   

 

남은 자(Remnant)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24.37-39)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

당신이 창조한 세상이 사람(아담)에 의해 타락한 세상이 되었고, 급기야 저들의 후손들에 의해 심판할 세상으로 전락해 버렸으니 말이다. 하나님의 외로움이랄까, 심판하심으로 이 땅을 찾아오실 수 밖에 없으신 절망감이랄까,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떻든 그분은 유쾌하거나 즐거우시지 않으신 세월들을 보내서야만 했다. 이 기나긴 1,700년의 시간이 노아의 방주로 마무리되고 있다. 하지만 이 120(3b, 5.32, 7.11)은 하나의 쌍곡선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점차 온 인류에게 임박하고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이 노아와 그의 가족들 위에 임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그 교차로가 저 앞에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오고 있는 분문 앞에 서 있다.

   

 

노아 프로필(profile)

 

노아가 태어나기 126년 전에 아담이 죽고, 그리고 한 시대를 거룩한 여자의 후손으로 회복하기에 몸부림쳤을 에녹마저 그가 태어나기 69년 전에 승천한다. 아마도 이런 영적 공백기를 틈타 여자의 후손’(5)의 영적인 휘청거림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을 것이고,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에녹은 자녀들을 출산하는 일상생활의 여정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노아는 바로 이 영적(靈的) 거장들의 삶을 주목하였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만큼은 전인적(全人的)인 죄악으로 치닫던 셋의 후예 가운데서 유독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9)하는 의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여자의 후손(하나님의 아들들) 역시 아담과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야기, 그러니까 에덴에서부터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까지 창조와 타락으로 이어지는 인류사의 시작을 다 듣고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한 그 많은 여자의 후손들은 모두가 다 아담과 셋과 에노스, 그리고 에녹으로 이어지는 영적 법칙인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따르지 않았다. 이것이 가인의 후예들(4.10-24)과 다른 은혜를 받았음에도 그들과 방불한 삶으로 추락하고, 급기야 저들과 동일하게 심판의 대상이 된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아만큼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9, 5.22,24)하기를 통해 시류를 역류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갔다. 어찌 이런 노아를 하나님이 주목하시지 않으셨으랴!

아담과 에녹이 없는 세상, 이런 영적 공백기를 틈타 여자의 후손들마저 영적 긴장감이 점차 약해지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아들들 역시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2) 삼으면서 육체가 되어가면서 사람들은 점점 패괴해져 갔다(1-6,11-12). 이런 세상을 보신 하나님은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3a)라시면서 심판을 예고하시기에 이르고 말았다.

이런 때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기라는 외줄을 타며 아담과 에녹으로 이어지는 영적 계보를 쫓아 살았고, 하나님은 그를 주목하셨던 것이다. 온 인류가 심판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단 한 사람 노아만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9)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사는 것이 상식이 된 사회에서 외눈박이(주바라기)로 살아간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는 모든 기득권을 다 포기하고 사는 것을 의미했다.

   

 

방주신학(方舟神學)

 

세상을 물로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발표되면서, 또한 동시에 방주를 통해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구원하겠다는 말씀이 동시에 하달된다.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노아가 시공한 방주의 크기는 W13,500 D2,250 H1,350 CM, 모양은 3층으로 된 직사각형이며, 제작 기간은 무려 120년이나 걸린 그야말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3b,14-16,22).

하나님은 노아에게 심판과 구원의 이중적 계시와 그것이 집행되고 있는 현존을 방주를 통해 드러내신다. 그런 의미에서 방주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며 죄에 대해서는 심판을, 의에 대해서는 구원을 알리시며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하나의 증거다.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13b)다는 종말(終末)을 재촉한 것은 순전히 인간의 타락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의 적용 때문이며, 노아를 구원하신 것은 의인을 죄인과 함께 멸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적용 때문이다.

방주가 지어져가는 것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 쌍곡선(심판 vs 구원)의 끝 부분이 가까워지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온 인류는, 특별히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한 여자의 후손들은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24.38-39a) 어떤 결론 앞에 서있든지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한편 다른 사람들(특히 가인의 후예들)은 몰라도 아담과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여자의 후손들은 에녹과 노아로 이어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언행(言行)을 보고 들으면서 어떤 식으로든 노아가 하는 일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 같다. 세상이 불과 120년 후에 멸망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피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해답이 바로 지금 지어져가는 방주에 있음을 노아의 당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 복된 소식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4.37)

 

하나님의 계시는 알려지지도 않고 은밀하게, 그리고 갑작스럽게, 또한 어떤 기준도 없이 아무렇게나 마음 내키는 대로 진행되거나 알려지거나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애써 이를 무시하거나, 인정하러들지 않거나, 믿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산다.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때나,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공평하다. 이런 의미에서 방주는 하나님의 마음을 인류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하나의 증표(sign).

 

 

부스러기 묵상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11.5-6)

 

방주를 짓기 위해 노아가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먼저 시간적으로 120년이나 되는 장구한 세월과, 보통의 축구장만큼이나 큰 방주를 짓기 위해서 흘려야 했던 땀과 노동력이며, 상식을 초월한 대업(大業)인만큼 쏟아지는 비난과 손가락질을 감내해야 하는 인내며, 특별히 여자의 후손들까지도 이 일에 무관심하며 외면한 소외감이며, 단 하나의 말씀만을 믿고 이 대작(大作)을 완수해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영적 싸움이라는 유무형의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했다.

노아가 위대해 보이는 것은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그의 모습 때문이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22) 그는 요령을 부리지 않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마음대로 변경하지 않았고, 자신과 가족은 물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다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면서도 이를 조건으로 하나님께 뭔가를 요구하는 그런 꼼수 또한 철저하게 차단하면서 초지일관(初志一貫)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mission)에 충성했다.

온 세상이 하나님과 불화하며 파멸(파국, 심판)로 치닫는 것을 방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거기에 편승하여 영적 삶의 질을 유지하는 일에 실패하지도 않았고, 최소한 자기 가족들에게 영적 영향력을 미치면서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청지기적인 삶을 사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온 세상이 다 죄악으로 치우쳐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멸망하게 되는 길로 떠밀려간다 할지라도 세상과 동화되지 않는 끈질긴 영적 생명력을 유지하는 일에 성공한다.

방주는 노아처럼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한편 격동하는 죄악의 파도 속에서도 온 식구들을 거룩하게 보존하고 지켜내는 일에 승리한 노아가 한 없이 부럽고 좋아 보인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아내도, 아들들 뿐 아니라 며느리들도, 이처럼 여덟 식구 모두가 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일에 성공하도록 영적 리더십을 발휘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신앙 하나 지키는 일도 만만하지 않는 게 사실인데 어찌된 일이 모든 가족들을 다같이 신앙의 한길 가도록 이끌 수 있었다니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나 역시 아내가 있고, 또 아들이 셋인데 노아와 같은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노아다움(9)을 먼저 이루는 것이 노아처럼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길임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무엇보다 나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거룩한 사람으로 세우는 일에 성공해야겠다.

 

 

제목 날짜
창세기 맥잡기 2020.07.01
천지창조.天地創造(창 1.1-23) 2020.07.18
인간창조.人間創造(창 1.24-2.3) 2020.07.18
에덴동산(창 2.4-25) 2020.07.19
전적타락.全的墮落(창 3.1-7) 2020.07.19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야(창 3.9-19) 2020.07.19
화염검(창 3.20-24) 2020.07.19
살인(殺人)의 추억(창 4.1-15) 2020.07.20
아담, 130年의 고독끊기(창 4.16-26) 2020.07.20
아담, 800年의 희망찾기(창 5.1-32) 2020.07.20
노아, 은혜입기(창 6.1-8) 2020.07.20
노아, 방주짓기(창 6.9-22) 2020.07.20
홍수심판, 방주구원(창 7.1-24) 2020.07.21
노아, 또 하나의 시작(창 8.1-22) 2020.07.21
노아, 복(福)받기(창 9.1-7) 2020.07.21
무지개를 보라!(창 9.8-19) 2020.07.21
노아, 열국(列國)의 통로(창 9.18-10.32) 2020.07.21
바벨대첩(창 11.1-9) 2020.07.21
아브라함 스타트(창 11.10-32) 2020.07.21
아브라함의 소명(창 12.1-9) 2020.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