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130年의 고독끊기(창 4.16-26)

   20200106(묵상)

  

 

 

아담, 130의 고독끊기

Gen. 4.16-26

  

   본문 관찰

 

   가인의 후예(16-24)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1(아다) 야발/유발

             2(씰라) 두발가인

   셋의 후예(25-26)

     에노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구조2] 에덴전후사(2.4-4.26)

        에덴에서의 아담(2.4-25): 창조

        에덴을 떠나는 아담(3.1-24): 죄와 심판

        에덴 밖에서의 아담(4.1-26): 후손

  

 

은혜의 서곡(序曲)

 

   “아담이 130세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5.3)

 

전혀 다른 두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타락하여 죄 가운데 있는 아담(아벨/)과 가인이 그들이다.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한 사람이고, 후손들에게 죄가 흘러가게 한 사람이 아담이다. 그리고 세상 안으로 들어온 죄가 어떤 옷을 입고 세상을 혼돈스럽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부정적 샘플(sample)이 바로 가인이다. 하지만 이 둘은 다 죄인이면서 전혀 다른 그림을 세상에 전개시킨 장본인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은 이미 모두 다 죄인의 반열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이후의 삶을 전혀 다르게 열어간다는 사실이다. ()를 선택한 것도, 죄인됨 이후를 살아가는 것도 다 자유의지를 호흡하며 내뿜는 추임새일까. 다시금 저들의 족적을 추적해 본다.

   

 

가인의 후예(16-24)

 

하나님은 가인이 동생을 죽이기 이전에(6), 그 이후에(9,15) 이렇듯 세 번이나 가인을 찾아오셨다. 이는 그가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과는 대조적이라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없잖아 있다. 사실 모두가 제사를 드린 이후인데, 이는 아마도 그의 잘못된 예배의식을 치유(교정)해 주면서 그가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를 기대하시는 메시지도 들어있는 것 같다(6-7). 하나님은 또한 실패한 가인일지라도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9-12,15).

가인은 이처럼 날개가 꺾이고서야 순종하는 것일까(16a). 한편 그는 여호와의 앞을 떠나서에덴 동편에 거하면서 성을 쌓고 살아야 할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했다(14,16,17). 하지만 사람들로부터의 죽음을 두려워할 줄은 알았지만 하나님의 말씀(명령)을 버리고 살인죄를 범한 것으로부터 오는 하나님과의 분리(단절)이라는 영적(靈的) 죽음에 대해서는 별 고민이 없어 보이는 가인에게서 연민을 느낀다. 제사(예배)에 실패한 사람의 모습은 이런 것일까.

한편 그의 후손들 가운데는 건축업(17), 낙농업(20, 4.2 참고), 음악가(21), 중공업(22)의 장을 연 자들이 있었다. 세상은 빠르게 도시화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불과 몇 대()만에 일부일처(一夫一妻)가 아닌 일부다처(一夫多妻)라는 전혀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19-21). 이 일은 라멕이라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데, 이와 함께 죽고 죽이는 일들이 맞물려 있음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23).

부인이 여럿인 것에 대해 지금의 잣대로서 이해하는 것은 일단 접고라도, 당시의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이 옳은지 틀린지에 대해서도 명쾌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때문에 이런 논의는 일단 보류하겠지만, 그럼에도 라멕의 말에 들어있는 내용을 볼 때 가정제도의 변화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아 보인다. 죽고 죽이는 일들이 다처(多妻)와 연결되어 함께 언급되고 있음에서 그렇다. 이만큼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있었다. 이는 가인의 계보에 하나님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셋의 후예(25-26)

 

하와가 셋을 낳고 그후 많은 자손이 그 뒤를 이어간다(4.25-5.32). 아벨의 죽음으로 구속사(救贖史)의 흐름은 단절되는가 싶더니 하나님은 마침내 을 통해 인류 구속의 서장을 여신다. 아담이 아벨을 잃고 몇 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는다(5:3). 이 기나긴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아담은 과연 어떤 자가 되어 있을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가인의 후예는 이미 영적으로 통제불능(統制不能) 상태로 전락했다. 그런데 아담은 130년이 지난 후, -그러니까 에덴동산을 떠난 것도 비슷한 만큼의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가인 때문에 아벨을 잃어버린 후 다시 셋을 얻기까지 그는 이미 죄인이었음에도 아직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은 자로 서 있었다(25). 이게 참으로 귀해 보인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가인, 1)는 고백은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셋째 아들 셋에게서 발아(發芽)된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25b) 어쩌면 아담은 다시 자녀를 낳는 게 죽음보다 더 싫고, 또 두려운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잉태의 희망과 기쁨은 다시 슬픔과 고통의 눈물로 막을 내릴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이를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에게서 톡톡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 좌절과 고통의 몸부림으로 보낸 세월이 벌써 130년이나 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들 부부는 비록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를 범하고 타락하였지만, 그 이후를 이처럼 휘청거리면서라 할지라도 여기까지 힘겹게 달려왔다. 그리고 셋째 아들을 얻고서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토해 낸다. 생각할수록 눈물 나는 대목이다. 특히나 가인 대신이 아니라 아벨 대신에, 그러니까 죽은 아벨을 다시 받았다는, 아니 이 아들은 아벨처럼 자라주기를, 더더욱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아벨처럼 자라게 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25).

더 이상 자신들의 쓴뿌리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는 아담 부부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하나님이 내게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외침인가. 자신은 죄()를 시작했으나 하나님은 셋을 통해 의()를 시작하시기를 이들 부부는 태어난 셋 앞에서 정말이지 눈물로, 간절하게,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을 것이다. 이런 세월이 또 다시 105년이 더 지났다(5.6). 그리고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26a). 아담의 나이 235(5.3,6)가 되어 비로소 다시 여호와의 이름이 불리워지는 날을 맞는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b)

아담은 130년의 고독을 105년의 인고의 세월에 담아 새롭게 빚어낸 셈이다.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와 찬양의 새 날을 말이다. 영적 대물림이 이루어지지 못한 교육의 실패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려는 아담의 애씀이 알알이 배어있는 세월들이다. 셋이 105세가 되도록, 그리고 그가 가정을 이루어 마침내 아담이 할아버지가 되는 날까지 그가 지불해야 했던 셋을 향한 신앙의 가르침, 이것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묵상에서 상상해 낸 그런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아담이 태어나고 235년이 지났다. 그는 이미 에덴을 잃어버렸고, 인류에게 죄를 공급한 장본인이다. 타락 이전에 유일하게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과 교제했으며, 하지만 그후에는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가 가인 라멕의 계보가 아닌 셋 에노스의 계보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찾아냈다는 것, 그렇다면 그는 지난 세월을 비록 죄 가운데 타락했으나 하나님으로 더불어 살아보려고 발버둥친 역설의 시간들을 보낸 셈이다. 참으로 끈질긴 아담의 됨됨이다.

이렇듯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을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이게 다 아담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는 235년 만에 셋과 에노스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영적으로 재기한다. 오랜만에 아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을 것이다. 가인과 아벨에게서 비롯된 슬픈 노래를 훌훌 떨쳐버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새노래의 향연, 마침내 아담의 새로운 부흥이 불타오르는 순간이다. 비로소 아담 에노스로 이어지는 여자의 후손’(3.15)이라는 구속사의 대장정이 130년과 105년을 합한 235년의 고독이라는 고치집을 뚫고 메시야를 향해 비상하기 시작한다.

 

 

부스러기 묵상

 

아담의 아들 셋이 아들을 낳을 때를 좀 정리해 본다.

가인과 이별하고서 셋째 아들 셋을 낳을 때 아담의 나이는 130세다(5.3). 그리고 다시 셋이 에노스를 낳을 때가 아담의 나이 235세다(5.6). 아담이 몇 살 때 범죄했고, 언제 에덴에서 쫓겨났고, 몇 살 때 가인과 해어졌으며, 아벨을 낳고 몇 년 만에 셋을 낳았는지, 아벨이 죽고 얼마 만에 셋째 아들 셋을 낳았는지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니까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를 받은 이후 살아온 130년 세월은, 특별히 타락 이후의 삶은 온통 고통과 눈물로 가득한 세월이었다.

선악(善惡)을 아는 일에는 하나님과 공유적 속성을 갖게 되었지만(3.22a)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타락으로 얻은 비극적 유산에 불과하다(2.17). 때문에 영생하는 일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불가 판정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3.22b) 결국 에덴동산으로 영광은 끝이 나고 파란만장한 삶으로 추락하였다. 이것이 그의 지금까지의 130년 세월이었다.

하지만 아담이 폐인(廢人)이 되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자학(自虐)함으로써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 아닌 듯하다. 이게 그의 인생이 반전되는 한 가닥 희망의 씨앗이었다. 이처럼 추론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아벨을 잃은 후 셋째 아들인 셋을 낳았을 때의 신앙고백 때문이다(25). 이 기나긴 시간을 그는 아벨과 삶을 살 때로 돌리고 싶은 희망을 품고 살아왔다.

그는 아내 하와와도 이별(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꾸려왔다. 에덴에서 하나님의 심문을 받을 때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회피)할 때와는 다른 삶이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은 아벨을 잃고, 가인마저 자신들의 품을 떠나고, 장구한 세월들을 서로 위로하면서 지켜왔을 것이다. 셋을 잉태하였을 때 그들의 언행에 하나님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 여태껏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왔음에 틀림없다.

이제 저들은 아들 셋이 먼저 죽은 형 아벨의 대()를 이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는, 그래서 온 식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새롭게 부흥되기를 열망했을 것이다. 그 희망의 씨앗이 지금 아들 셋이다. 그리고 이 희망은 셋이 에노스를 낳기까지 더불어 살아온 105년의 시간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다(26, 5.6). 비록 죄인 되었으나 의롭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둘 세상 속에서 자라가고 있었다(5.3-4). 이것이 가인의 후예들과 셋의 후예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영적 간격이었다.

아담은 창조된 후 타락 이전까지 에덴에서 누렸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떠올리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으나 하나님과의 멀어진 간격을 좁혀보려고 발버둥 쳤으리라. 이것 역시 추측이지만 가인은 아버지 아담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따르지 않았고, 아벨은 어떻게든 하나님과의 만남의 끈을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 아담을 통해 듣고 알게 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을 자신의 삶으로 펼쳐 보이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것 중 하나가 열납된 제사였을 것 같다.

이제 영원히 단절된 것 같았던 하나님과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마침내 셋에게 전수되었고, 전적타락(全的墮落)으로 구원(영생)을 잃어버렸지만 타락 이후에도 남아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3.8,10,12,13b), 역시 타락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말씀들(16-24)을 총동원하여 아벨/에노스로 이어지는 여자의 후손’(3.15)을 향한 마지막 사명을 굳게 붙잡고 또 성취해 가기 시작한다.

아담(하와)은 비록 가인에게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했지만 다시는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새롭게 했으리라. 마침내 조그마한 열매가 셋에게서 시작되었고, 급기야 에노스에게서 찬란한 희망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b)

이제 세상은 아담, 하와, 셋과 아내, 에노스, 그리고 아담과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자손의 번성을 통해(5.5,7-8,9-10) 영적 부흥이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세상 속에 심어나가는 일에 깃발을 올린다. 가인의 세속문화가 번성하면 할수록 아담은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문화의 흥왕을 위해 온 몸을 불태웠을 것이다. 과연 이 두 문화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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