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을 알면 구원이 보인다(창 20.1-18).

20200129(묵상)

   

 

 

아브라함을 알면 구원이 보인다.

Gen. 20.1-18

  

   본문 관찰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그랄에 거류하며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네가 죽으리니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先知者)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하게 하셨으니

 

      [구조2]

      B 하나님의 약속 vs 아브라함의 순종(12.1-9)

         C 애굽에서의 사라의 위기(12.10-20)

            D 롯과 소돔(13.1-14.24)

               E 아브라함 언약(15.1-16.16)

               E’ 아브라함 언약 갱신과 이삭의 수태고지(17.1-18.15)

            D’ 롯과 소돔(18.16-19.38)

         C’ 그랄에서의 사라의 위기(20.1-18)

      B’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vs 아브라함의 순종(21.1-22.19)

   

 

언약의 위기

 

현재의 잣대로 구약을 읽을 때에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과연 어찌해야 할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브라함은 넓은 의미에서의 현대적 의미의 인신매매(人身賣買), 혹은 자신만이 살아보겠다는 매우 편향된 도덕성 때문에 아내가 만약 [이혼 및 위자료 청구소송]을 가정법원에 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그는 필패(必敗)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도덕적인 처사 때문에 사회적 지탄뿐만 아니라 신앙공동체 안에서 따돌림을 받게 되거나, 교회의 중직자로서 그는 마땅히 치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고 계속해서 심각한 과오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창세기의 시야를 통해 보여지고 있는 모습, 그러니까 오늘의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아브라함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구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할 때 보다 중요한 진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브라함(인류, 인간)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가 라는 하나의 큰 그림인데, 먼저 아브라함의 일생을 조감하면서 살펴보자(구원의 경사도).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구원받았어도 아직 이처럼 -본문은 아래 에 들어있다- 산다.

 

   아브라함의 구원: 이신칭의(믿음) 할례(행위)

    ① 12.1(소명/부르심, 75)

       -12.7-8(“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12.10- (애굽 왕 바로 #아내=누이).

       -15.2(“엘리에셀”)

    ② 15.6(이신칭의 은혜언약)

       -16.16(이스마엘을 낳다, 86)

       -17.18(“이스마엘이나 ”)

          *사라 아들(16,19) 웃음’(17, 18.12,15)

    ③ 17.24(할례 행위언약/율법, 99)

       -18.1- (나그네 대접)

       -20.1- (그랄 왕 아비멜렉 ##아내=누이).

    ④ 22.1(순종/행함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다).

 

바울 역시 로마서 4장에서 창세기의 구원신학을 확증한다(1-25). 이것은 창세기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경사도와 동일한 구조다. 먼저 아브라함의 이신칭의는 무할례시였다(3,10-11). 그러므로 행위로 의롭다함(칭의)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2). 이처럼 이신칭의(以信稱義) 자의 행복은 다윗의 말한 바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8, 32.1- 참조)는 말씀처럼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자로서의 복이다. 또한 아브라함이 받은 이신칭의(22)의 복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은 우리도 위함이다(23-24a). 이 말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다 행위(할례)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선언이다.

   

 

아브라함의 동일한 실수

 

아브라함이 왜 약속의 땅을 떠나 남방 네게브로 이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동은 이미 불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한편, 하나님의 해법은 매우 이상하다. 이러한 해법은 처음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동일한 범죄를 자행한다(위의 이전에 한번, 이후에 한번이다). 그런데 죄는 아브라함이 지었음에도 벌은 그랄 왕 아비멜렉이 받는다. 창세기 12장에서도 애굽 왕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이 내려졌다(10-20). 이상하지 않는가?

그러나 죄의 해결이라는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방식은 여전히 은혜다. 죄는 인간 아브라함이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신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그의 연약함을 당신의 사랑과 은혜로서 대신 맡아 주셨다. 나는 약할지라도 주의 능력은 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크신 은혜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나의 연약함, 계속해서 반복하는 죄의 문제까지도 온전하게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아브라함의 믿음 역시 연약하다. 이미 의롭다함을 얻었음에도 그는 계속해서 죄를 범한다. 이것은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연약한,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한다. 몇 가지 더 중요한 영적 교훈들이 있다. 첫째,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그 구원마저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보장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믿었다는 행위가 구원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다. 둘째, 나 역시 이미 구원받았으나 여전히 범죄할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는 연약하여 깨지기 쉬운 그릇이다. 셋째, 그러므로 연약함 바로 그때가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떠나기를 세 번이나 간구한 후에 그는 이 약함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

나 역시 믿음이 있으나 동시에 연약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자비를 받을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바로 그분이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약한 자의 하나님이시다. 연약한 자의 주님이시다. 더욱 감사한 것은 연약함 그대로 나를 방치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고 나의 모든 약함을 담당해 주셨다는 점이다. 때문에 오늘도 이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믿음으로 서자!

 

   찬송가 279인애하신 구세주여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자비하신 보좌 앞에 꿇어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하니 믿음 주소서.

    주의 공로 의지하여 주께 가오니 상한 맘을 고치시고 구원하소서.

    만복 근원 우리 주여 위로하소서. 우리 주와 같으신 이 어디 있을까.

    [후렴]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한편 믿음의 이탈은 다음 몇 가지 문제를 가져왔다. 먼저 아브라함과 사라의 죄는 다른 사람들의 범죄를 야기하였다. 그들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 발생한 것이다. 나 한사람 때문에 여러 사람이 큰 해를 받게 된다는 무거운 영적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7b). 거룩이 훼손되자 사라는 육신의 정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도전이다. 거룩까지 나아가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렸으나 세상에 노출되어 표류하는 조각배가 되는 것은 순간이다.

사실 세상은 거룩과 속함을 구별(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남용하여 인간적인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려 할 뿐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이 나를 정복하려고 하는 것도 무서운 전쟁이지만, 세상 앞에 무장 해제하고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날 잡아 잡수세요!”라는 식으로 그리스도인의 최소한의 영적 자존심마저 포기해 버린다면 그것은 심각한 죄악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나 한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그래서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명하신 것이다. 나는 나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을 양산하는 사람은 아닌가. 내가 속한 공동체는 나 때문에 언제나 그랄 왕 아비멜렉과 그에게 속한 자처럼 취급당하지는 않나 모르겠다. 나 한 사람이 제자리를 찾으면 모든 문제는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가족에게 전가할 일이 아니다. 나 한사람 때문에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서 그랄 왕과 그의 백성들처럼 취급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스러기 묵상

 

그랄 왕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해결해야 할 해법 또한 중요한 부분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경고에 귀 기우려야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매우 중요한 메시지라면, 동시에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요구하신 것 역시 이 문제를 원점으로 돌리는 해법 가운데 중요한 메시지다: “돌려주시오!원 위치로 되돌리라는 메시지다. 회복이다. 이것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다. 참으로 멋진 드라마처럼 내게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아브라함과 그랄 왕 둘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화목이었다. 하나님은 이들 모두의 수치와 죄의 짐을 풀어주셨다.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이 해결하실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무릎 꿇고 주님의 은총 앞에 언제나 서야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평화가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아브라함과 그랄 왕 이들 모두의 실수와 실패를 이처럼 아름답고 빛나는 복된 것으로 바꾸어 주셨다. 이 일은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인간은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강압(강제)적으로 윽박지르시거나 협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에게 이 모습으로 찾아오셨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문제의 해법을 거부하지 말아야겠다. 이것이 내가 살 길이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으면서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는 것들은 없는가. 내 욕심 때문에, 내 자존심 때문에,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물귀신 작전 때문에 모두가 다 필패(必敗)하는 방식으로 자멸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 나를 둘러싼 심판과 실패를 막아낼 수 있다. 나 역시 돌려주어야 할 것은 없는가? 오늘도 하나님은 세상으로 하여금 그들이 지고 있는 무거운 멍에를 내려놓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계신다. 세상은 이 엄중한 하나님의 선포를 들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이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세상이 잘못하고 있는 문제를,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담대하게 선포하며 증거할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겠다. 동시에 하나님은 오늘 나를 이런 사명을 감당하는 종이 되어 삶의 현장으로 파송하시고 싶어 하신다.

 

 

제목 날짜
이삭의 결혼식(창 24.10-67) 2020.07.29
이삭의 결혼 준비(창 24.1-9) 2020.07.29
사라의 죽음(창 23.1-20) 2020.07.29
아브라함: 부자행전.父子行傳(창 22.1-24) 2020.07.24
아브라함 vs 아비멜렉(창 21.22-34) 2020.07.23
이삭 vs 이스마엘(창 21.1-21) 2020.07.23
아브라함을 알면 구원이 보인다(창 20.1-18). 2020.07.23
롯 에피소드2(창 19.23-38) 2020.07.23
롯 에피소드1(창 19.1-22) 2020.07.23
아브라함의 기도(창 18.16-33) 2020.07.23
소돔이야기_서곡(창 18.1-15) 2020.07.23
할례: 행위언약(창 17.1-27) 2020.07.23
이스마엘 이야기(창 16.1-16) 2020.07.22
아브라함언약(칭 15.1-21) 2020.07.22
롯과 멜기세댁 이야기(창 14.1-24) 2020.07.22
아브라함 vs 롯(창 13.1-18) 2020.07.22
아브라함의 위기(창 12.10-20) 2020.07.21
아브라함의 소명(창 12.1-9) 2020.07.21
아브라함 스타트(창 11.10-32) 2020.07.21
바벨대첩(창 11.1-9) 2020.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