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 행위언약(창 17.1-27)

20200123(묵상)

  

 

 

할례: 행위언약

Gen. 17.1-27

  

   본문 관찰

 

   할례언약(1-2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할례행위(23-27)

   

 

할례 에피소드(episode)

 

   [아브라함]

   ▪12.1 - 부르심

     ▪15.6 이신칭의(以信稱義)

       ▪17.26 할례

         ▪22.12 아들 이삭을 바치다.

 

행위언약(할례)은 은혜언약 그 뒤를 잇는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함으로써 의롭다 칭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이 중요하다. 바울도 로마서 4장에서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르면서 구원신학을 선포한다. 하지만 17장으로만 놓고 볼 때 할례는 단순히 이스라엘에게 추가되는 의식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영원한 언약’(7,13)이다. 마치 다윗언약이 영원하다는 말씀처럼 들린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할례를 하나님의 백성됨의 흔들 수 없는 표라고 생각하는 흐름으로 굳어진다.

   

 

할례언약(1-22): 그래도 아브라함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❶ 神言1(1-2)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❷ 神言2(3-8) -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❸ 神言3(9-14) -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❹ 神言4(15-16) - 내가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아브라함](17-18): ‘하나님께 마음속으로 이르되 아뢰되

       ➀ 불신앙1(독백) - ‘웃으며’(17)

       ➁ 불신앙2(반문) - ‘이스마엘이나’(18)

   ❺ 神言5(19-21) -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종료(22)

 

           **

 

   아브라함의 나이

   75부르심(12.4)

     *상속자 요청1 엘리에셀(15.2)

     *이신칭의(以信稱義. 15.6)

   85하갈을 첩으로 얻음(16.3)

   86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음

   99할례(17.2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17.1)

     *상속자 요청2 이스마엘(17.18)

     *이스마엘 13할례(17.25)

   100이삭을 낳음

 

다섯 번의 하나님 말씀과 언약’(13)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후손 약속이 보다 더 분명하게 주어진다. 그는 75세에 부르심을 받은 이후 오늘 99세 할례를 받기까지 이런저런 일들도 많았고,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기다리시며, 그가 칭의(稱義)에 합당한 모습으로 서기를 기다려 주셨다. 그럼에도 오늘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불신앙적 언행(17,18)을 이어가면서 하나님의 연속적인 말씀에 완고한 반응을 보인다.

창세기 16장과 17장 사이에는 13년이라는 시간이 들어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스마엘타령이다(18). 하나님께서 아내 사라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16)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웃으며마음 속으로 또한 이렇게 생각한다: “100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17)

   

 

할례 행위(23-27)

 

하나님은 왜 당신의 이 언약을 남성의 생식기의 표피를 자르는 할례로 주셨을까. 한편 이스라엘에게 할례는 구원의 표로 인식이 되었다. 신약의 사도행전 초대교회 시대까지도 은혜의 복음에 더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은 자라는 토론(회의)이 열릴 만큼 할례는 율법을 행하며 사는 이스라엘에게 거의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평가하고 중요하게 보는 할례마저도 이신칭의(15.6)의 복음 이후에 행위언약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할례라는 행위언약을 행함을 보시고 나서야 이신칭의(以信稱義. 15.6)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게 아니다. 바울의 로마서 4장에서도, 무엇보다 창세기의 순서에서도 17장의 할례는 15장의 칭의에 이어서 주어지는 말씀이다.

   

 

부스러기 묵상

 

오늘도 우리의 행위에 따라 우리는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흠 많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이를 온전히 이루기까지 아브라함은 물론 우리를 품으시고 성장과 성숙의 자리로 이끄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혹여 나의 도덕과 윤리와 착함과 선행과 양심에 따른 행위로 구원하신다면 실제의 삶에서는 구원을 받은 때와 그것을 잃어버린 때 그 사이를 오가며 불안한 여정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반복적인 시간이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 얻음과 구원 잃음 사이에서 이를 다시 회복하고 얻기 위해 날마다 행위 구원을 위해 땀 흘리고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으로 인가. 인간의 행위로서, 행위가 기초한 구원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도 무용하다. 인간은 자기 의와 행위로 자신을 구원한다면 말이다.

비록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우리는 할례 받은 언약 백성이어서 큰 문제 없을 것이다는 이 헛된 생각과, 그에 따른 거침없는 죄악된 행위가 결과적으로 할례언약의 아킬레스였다. 택한 백성이고, 언약 백성이고, 제사장 나라인데 뭐 큰 일 있겠냐는 이 교만한 마음이 병이다. 생각해 보라. 구원과 평강의 삶이 단지 표피를 잘라내는 행위로부터 오는 것이냐는 점 말이다. 우리가 행하는 의식과 행위는 그것을 명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그 행위를 요구하는 하나님이 그것 속에 기대하시는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일 때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행위만 있을 뿐 이를 명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요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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