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믿음으로 사십니까?(창 45.1-15)

20200915(묵상)

  

 

 

건강한 믿음으로 사십니까?

Gen. 45.1-15

  

   본문 분석

 

   요셉이 자신을 밝히다(1-8).

   [재회의 입맞춤]

   17(팔리다, 37.2) 

      → 30(총리, 41.46)

         → 39(알리다) = 7(풍년, 41.47) + 2(흉년 2년째, 6,11)

      ③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2a)

   온 형제들이 다 화해하다(9-15).

         ④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14a)

      ⑤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15a)

   

 

요셉 이야기

 

우리는 성경에서 요셉 이야기를 대하면서 몇 가지 굵은 특징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건강하다.

*긍정적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마침내 두 번에 걸친 요셉의 형들에 대한 시험의 전모가(42,45), 아니 요셉이 애굽에 내려간 섭리행전의 전모가 밝히 드러난다(5-8). 이렇게 해서 요셉도 울고, 형들도 다 우는 화해의 대하드라마가 연출된다(14-15). 요셉은 파란만장한 지난 22년의 세월을 복수의 칼을 품고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며, 분노와 상처를 이기며, 먼 타향에서 신수성가(神手成家)의 삶을 승부해 왔다. 이렇듯 요셉은 그 기나긴 세월을 화해자로 자신을 준비하며,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정도(正道)를 걸어왔던 것이다.

유다의 참회록에서 드러났듯이 화해의 준비는 요셉에게만 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야곱의 모든 아들들에게 이 일을 고난의 세월 안에 품게 하셨고, 마침내 그 손을 서로서로 내밀게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처럼 일하시는 분이시다.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이 토해내는 눈물의 신비어천가(神飛御天歌)는 오늘 우리가 불러야 할 바로 그 노래다.

   

 

나는 요셉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열 두 아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37.3)라고 성경은 말한다. 한편 요셉의 어머니는 라헬이다. 라헬은 야곱의 사람을 받던 아내이다. 아버지 야곱은 어떤 아버지인가?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인 험악한 세월’(47.9)을 사는 동안 그는 하나님께 붙잡혔던 아브라함과 이삭의 손자이자 아들인 복된 사람이다. 속이는 자였던 그는 20년 동안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서서히 다듬어졌고(31.38), 마침내 귀향하던 얍복 나룻터에서 하나님께 항복함으로써(32.24-32)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

요셉이 어릴 때부터 성장하면서 영향을 받은 아버지 야곱은 이제 더 이상 형과 아버지와 외삼촌을 속이는, 또한 자신 역시 속아 넘어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새로운 사람, 성숙한 사람이었다. 바로 그 아버지의 전인적인 영향을 아들 요셉은 가장 가까이에서, 마음으로부터, 온전하게, 가감 없이 채득(債得)할 수 있었다.

   

 

1. 신앙한다는 것은?

 

신앙한다는 것은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린 이후의 요셉의 일생을 이해하는 기초다. 요셉은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다. 그가 13년 동안의 어둡고 칙칙했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고통의 시기를 매우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힘은 17세 이전에 준비된 건강한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는 우리는 요셉의 일생을 묵상하면서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먼저 요셉이 13~30세 사이에서 보여준 모습에서 신앙이 무엇인가.

(1) 신앙이라는 것이 믿습니다라는 확신의 크기나 그 유무(有無)에 있다면, 또한 기도하고 성령충만하게 살면 환란(시험, 고난)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다면, 혹은 문제가 터진 이후에 그것을 염려하지 않도록 만들거나 그것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신앙이라면 우리는 그런 의미의 신앙을 요셉에게서 발견하지 못한다.

(2) 신앙이라는 것이 일상의 생활이라는 평면에는 잠복해 있다가, 그러니까 좀 더 다른 말로 하면 생활의 별 무리가 없을 때는 그냥 물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가 어떤 심각한 위기나 고난을 만나면 그때에야 비로소 기다렸다는 듯이 힘을 발휘하는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의미의 신앙을 요셉에게서 발견하지 못한다.

(3) 자기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의 요구들과 -요셉으로 하면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서와 감옥의 사무장으로서의 일을 통하여 그에게 부과된 임무- 소위 신앙인들이 생각하는 종교적인 일들과는 서로 관계가 없거나, 전자가 후자에 비해서 중요하지 않거나, 후자를 열심히 하는 것을 전자가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후자를 위해서는 전자는 아낌없이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건강한 신앙이라면 우리는 그런 의미의 신앙을 요셉에게서 발견하지 못한다.

(4)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이런 의미(1-3)의 신앙이, 그러니까 전통적으로 잘못 이해된 신앙적인 것들만을 붙들고 있으면 좋은, 혹은 건강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요셉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을 거의 모두 다 잃거나 관심하지 않게 된다.

(5) 신앙이 단순히 자신이 만난 문제 해결의 수단이거나, 또한 이미 만난, 그리고 앞으로 만날 문제의 극복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보험)라면 우리는 요셉에게서 이런 의미의 신앙을 발견하지 못한다.

 

2. 건강한 신앙

 

, 그렇다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요셉은 한 번도 현재 우리들이 하고 있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이 점이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13년의 암흑기를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욱 건강하게 승리했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서 있다. 바로 이 점이 요셉의 신앙이 얼마나 아름답고 건강한가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요셉은 건강한 신앙의 한 모델(model)이다. 그를 알면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건강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길이 보인다.

(1) 요셉의 신앙은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가 만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춤을 추는 그런 신앙이 아니었다. 오히려 환경을 지배한다. 어디에 내 놓아도 신앙의 경쟁력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과,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으면서 마침내 건강한 신앙의 사람이 된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도 여러 해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은 지금도 기초공사나 하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를 어디에 내 놓아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건강한 신앙의 사람은 바로 이처럼 준비된 사람이다.

(2) 요셉은 어떠한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놀라우리만큼 삶의 균형을 유지했고, 긍정적이었다. 결코 비관하거나, 자포자기(自暴自棄)하거나,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그것은 이미 그가 신앙의 초보 딱지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앞뒤가 꽉 막힌 융통성 없는 답답한 사람이 아니다. 덮어 놓고 믿기만 해 버린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땅에서 출발해서 하늘에 이른 그런 신앙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자신을 통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철저하리만치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3) 신앙은 우리가 만난 문제를 단순히 땜빵하는 그런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의 건강한 믿음을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할아버지 이삭의 신앙과 증조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기라성 같은 신앙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자신의 존재 전부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었다.

이러한 신앙의 눈높이를 견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노예로 팔리고,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그리고 급기야 감옥에 갇혀도, 더더욱 꿈을 해몽하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도, 그 이전이나 이후가 똑같은 건강한 신앙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다. 신앙의 목표는 총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어디에 두실지라도 그 하나님 앞에서 흔들림 없는 그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스러기 묵상

 

누가 건강한 신앙의 사람인가?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전부를 철저하게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는 신앙을 통해서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으로 사는 이유가 결국은 자기의 계획과 어떤 꿈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됨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사람이다.

신앙 그것 자체가 목적인 사람이다. 단순히 종교적인 일들에 매우 익숙하게 길들여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금 바로 거기에 부르신 분의 의도와 섭리가 있음을 보며, 그것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이 자기 존재의 가치임을 믿는 사람이다. 요셉의 자기 고백을 들어보자.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39.9)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45.5,7-8)

 

앞에서 묵상했듯이 요셉은 우리들이 겪는 그런 식의 종교의식이나 행위들로부터,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을 마침내 이겨냄으로써 참으로 훌륭하고 빛나는 신앙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다시 정리하면 요셉은 환난을 통해 건강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건강한 사람으로서 환난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가난한 신앙의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시작종이 울리기만 하면 거의 자동에 가깝도록 익숙해진 종교의식과 열심, 그리고 교회에서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신앙지수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 나는 언제나 요셉처럼 고백할 수 있을까?”가 기도의 제목이고, 소망이다. 이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고백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많은 것 같다. 이것이 신앙의 가장 큰 병()이다. 그러나 요셉을 보라. 그렇게 고백하기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그처럼 살았더니 그렇게 고백하게 된 것이다. 요셉의 신앙 환경은 근무하는 곳이요, 감옥이요, 바로의 궁전이었다. 우리의 신앙 환경인 교회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피어나서 꽃핀 건강한 신앙이다.

그렇다. 오늘 본문에 서 있는 건강한 요셉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빛나기까지 그는 13년이라는 무수한 시간들을 자신이 서 있는 삶의 현장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할 줄 알았다. 아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믿었고 알았다.

당신은 신앙은 건강한가. 당신은 건강한 믿음으로 사는가. 이제 우리는 믿음을 다시 생각해 볼 때를 살아간다. 종교성 속에 갇혀 있는 믿음이라는 씨앗, 그것은 한 알 그대로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믿음은 신앙고백 속에만 있지 않다. 믿음은 내가 믿습니다고 외치는 선언 속에만 있지 않다. 믿음은 기도나 찬송 속에만 있지 않다.

믿음은 노예로 팔려가는 길목에도, 보디발의 아내가 은밀히 유혹하는 자리에도, 감옥에도, 바로 앞에서도, 삶의 전 영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 마침내 열매 맺어야 할 살아있는 씨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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