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召命)에로의 부르심(출 3.1-12)

20200830(양무리교회)

 

 

 

소명(召命)에로의 부르심

Ex. 3.1-12

 

    본문 관찰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1-6)

    모세에게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7-10)

    모세의 소명에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11-12)

  

 

모세야, 지금이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에서 모세를 찾아 오셨다.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소명(召命,calling)을 받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신 것이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제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5.13-14)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인도하는 심부름꾼이 되는 순간이다. 모세가 어느 날 갑자기 이스라엘 민족에 향한 큰 뜻,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자 하는 뜻을 품은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서 출애굽을 시도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따라서 나 역시 내 계획과 소원, 그리고 자가발전(自家發電)된 내 열심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신다. 역사는 늘 하나님이 죄인된 인간을 찾아오심으로 시작된다.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1-6)

 

사도행전 7장에 있는 [스데반의 설교]에 보면, 모세의 일생은 바로의 왕궁에서의 40(20-23), 광야에서의 40(23-29),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인도한 40(30-36)이라는 세 시기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제 모세의 나이 80, 돌이켜 보면 40년 전 그때 장인의 양을 치는 지금보다 바로의 궁전에 있던 호조건의 모세를 사용하셨어야 옳아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자신의 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고자 할 때는 침묵하시더니, 이제 나이 80세 때 양무리를 치고 있는 모세를 찾아오셨다.

한편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행사가 능했던 40세 무렵에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열심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2.13-14, 7.22-24). 그러나 그 일은 실패하고 만다(2.13-14). 하나님은 인간 모세를 원하시지 않았다. 아직 그는 하나님의 모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스데반은 이 사건을 이렇게 증거한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닫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7.25) 그리하여 모세는 결국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하였고, 그후 40년 동안 야인처럼 광야에서 양을 치는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았으면 그렇게 살다가 끝나는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결코 모세를 실패자로 방관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이미 황혼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직 모세에게 받으셔야 할 몫이 남아 있었다.

모세의 첫 열심은 실패했었다.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불러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작정, 계획)을 이루려고, 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모세를 사용하실 리 만무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떠한 뜻을 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써 인간을 사용하신다는 하나님의 법칙에 무지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모세는 애굽 사람의 말과 학술을 배웠을 뿐이다(7.22).

인생의 불행은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데, 마치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시작하신 것처럼 자신의 힘(계산, 계획)으로 일하기를 시작하는 것에 있다. 이는 인간 최대의 교만이다.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모든 것이 인간 불행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불러야 한다.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죄악은 없다. 하나님이 시작하셔야 한다.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한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의 때를 조용히 기다리면서 준비해야 한다(3.12-14).

하나님이 드디어 이스라엘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는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일을 친히 시작하신다(2.23-25).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심으로, 모세를 찾아오심으로 -모세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시작하신다(2). 하나님은 드디어 창세기 1513-14절에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을 성취하기 시작하신다. 모세가 아니다. 하나님이다.

그런데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떨기나무(가시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불이 사그라지지 않고 가시나무가 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2). 이것은 하나님의 불은 떨기나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에 의존적이시지 않다. 그분은 홀로 스스로 존재하시며, 역사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철저히 무능력하다. 또한 모세가 자신의 열심으로 점화한 불꽃은 금방 사그라지고 만 열심이었으나(2), 40년 동안이나 꺼져버린 모세의 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불을 상징한다.

 

모세야, 너는 떨기나무처럼 볼품없다. 그러나 내가 볼품없는 떨기나무와 같은 모세 너에게 붙여 준 나 여호와 하나님의 불은 나무(모세) 때문에 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 스스로가 태우는 불이다. 모세(떨기나무) 너의 열심 때문에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 아니고, 또 꺼질 수도 없고, 나 여호와의 열심이 계속되는 한 이 불은 꺼지지 않는다. 하나님 내가 불을 붙여주는 한 영원히 타는 떨기나무가 될 것이며 너의 힘으로가 아니라 나 여호와의 열심으로 아브라함과 언약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약속을 이룰 것이다. 이제 이후로는 모세 네가 아니라, 하나님 내가 일 할 것이다. 모세 네가 할 일이란 유감스럽게도 아무 것도 없다. 너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이제부터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불을 밝힐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종으로 모세를 만들어 가신다. 그러므로 이처럼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할 뿐이다(4).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모세의 소명이다. 내 열심일 때는 얼마나 타던가? 내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조그마한 믿음이 자라 가면서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해 간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인생이다. 이것이 또한 신앙의 부흥(성숙)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 오셔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셨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며, 인간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인 종일 뿐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할지라도 그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이 모세로 하여금 자기에게로 가까이 하지 말 것을 명하신 이유이다(5). 그리고 모세의 발에서 신을 벗기신다. 모세는 죄인이며 종이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선 존재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은 죄인인 모세를 새롭게 하시는 일을 먼저 하신다. 그리고서 하나님 스스로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임을 선언하신다(조상들의 하나님). 여기에 대해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서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린다(6).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의 나약함과 초라함을 동시에 발견한 것이다.

인간 그 어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을까. 감히 누가 그 분의 권위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있겠는가. 모세는 드디어 하나님을 만났고, 그러자마자 그는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떨게 된다. 모세는 처음 태어날 때 죽었어야 했고, 애굽인을 죽인 후에 바로의 손에 죽었어야 했고, 40년의 광야생활 가운데 아무 이름 없이 죽었어야 할 존재다. 그리고 오늘 떨기나무 앞에서 죽었어야 했다. 어찌 하나님을 뵈옵고 살아난 자가 있는가.

모세는 이미 죽은 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려 주셨으니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다시 태어난, 거듭난 존재다. 드디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게 된다. 그의 열심이, 애굽의 학문이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는 드디어 중생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를 맛보았으니, 이제부터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고백하며 주의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해야 할 사명자로 떨기나무 불 앞에 서 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었던 나를 살려주셨으니, 이제 나도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죄에 대해서 영원히 죽은 존재로서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의 삶이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모세를 훈련시키시며 연단하셨다. 이처럼 귀히 쓰일 그릇인 모세는 오랜 훈련 기간을 통해 더 뜨겁고 강한 하나님의 불의 연단을 받게 된 것이다.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7-10)

 

이제 모세에게는 광야 이후가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이 친히 찾아 오셔서 그를 불러 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불러 주시고 인정해 주신 사람은 복 있다. 반대로 하나님이 거절한 인생, 하나님이 모른다고 외면하시는 인생은 불행하다(25.31-46, 염소와 양의 비유). 하나님 앞에 선 모세! 얼마나 위대해 보이는가.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인의 양을 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인생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앞에 선 존재,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존재로 서 있는 모세를 보라.

많은 사람이 있었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으나 하나님은 오직 한 사람 모세를 택하시고, 그와 대면하시고, 그와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뿐 아니라 그를 정결케 하사 이제 그를 불러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을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알고”(7,9)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영영 나의 환난과 시련과 시험을 구경하고만 계신다고 생각하는 불신앙의 소리가 내 조그마한 입과 마음에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듣고, 보고계신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은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먼저 절망하며, 하나님보다 먼저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그것보다 더 큰 불신앙은 없다.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하나님보다 먼저 결정하고, 하나님보다 먼저 판단하고, 하나님보다 먼저 행동하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의 안테나를 맞추는 묵상이기를 기도한다. 이제는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며 기다려보자. 하나님이 나의 환난을 외면하시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낸 자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내가 내려와서”(8)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다.

비록 아직은 애굽의 노예로 있지만, 이미 그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약속의 땅=가나안)으로 인도함을 받은 거나 다름이 없다. 하나님은 식언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내가 너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10).

하나님의 선언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시기를 원하신다. 오늘도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있는 인간의 현장을 보고, 듣고, 알고계신다. 또한 하나님은 교회가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보존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이 일에 나는 누구인가?

   

 

모세의 소명에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11-12)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4)라고 응답한 이후에 긴 침묵을 깨고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 앞에서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11). 모세의 절규를, 모세의 피를 토하는 통곡이 보이는 듯하다. 이것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14.36)라고 절규하셨던 그리스도의 기도와 같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40년 동안 광야의 시험을 통해 깨달았고, 이제는 그 모든 회개가 옳았음을 하나님께로부터 확인 받게 된 모세로서는, 이전에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행동했던 구속함을 받기 전의 모습을 완전히 버리는 고백을 하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 감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음을 진실로 고백하기에 이른 것이다.

모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 칼빈(J. Calvin)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가 불순종했다고 비난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서 그가 그 일에 합당치 않으므로 그 임무를 거절한다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로와 비교한 것은 그것을 거절하기 위한 부가적인 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무런 책망을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서 말씀하시기를 모세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하신다. 이제 모세는 더 이상 고독한 광야에서 오직 양무리를 벗삼아 하늘의 별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12)

 

하나님이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라며 절규하는 모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12)라고 말씀하신다. 모세는 이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모세가 하나님의 손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의 손을 붙잡고 계신다. 하나님이 모세를 붙잡고 계시니 이제 모세는 성공자다. 바로도 두렵지 않다. 더욱 자기 자신도 두렵지 않다. 광야도, 자기를 광야로 몰아 넣은 일에 한 쪽을 담당하며 자신의 죄를 지적했던 이스라엘 백성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부스러기 묵상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

    번제물로 드려지기 위해 모리아 산을 오르던 이삭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

    형 에서의 낮을 피해 험악한 인생을 산 야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

    바로의 품에 있던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

    지난 80년 동안 오늘이 있기까지 자신 모세를 인도하셨던 하나님!

 

인생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이제 모세의 적은 없다. 바로도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 누구도 모세의 대적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두려울 게 아무 것도 없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41.10, 8.38-39)

인생은 누구나 과거가 있다. 그것이 나를 절망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올가미로 언제까지나 나를 죄 아래서 허덕이게 하기도 한다. 사탄이, 불신앙이, 교만이 그렇다. 어떤 인생도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외면하시지 않고 찾아오신다. 그리고 깨끗하게 하시고서 모세와 같이 쓰시겠다 하신다. 오늘도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부르시고, 만나주시기 위해 마음의 창을 강하게 두드리시는 노크 소리를 듣는다. 황홀할 뿐이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저 광야(세상)로 도망간 모세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부르시는 떨기나무 불 꽃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세인가.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 나 역시 그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부르고 계신다. 오늘은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기회의 때다.

한편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 속에는 출애굽(구원) 이후의 그림이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음이 매우 흥미롭다(12):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제는 바로 대신 하나님을 섬기라 하신다. 출애굽이란 단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장소만의 이동이 아닌, 바로 그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출애굽기의 구조에서 빛난다:

 

    출애굽.구원[1-18]

        → 율법.말씀[19-24]

            → 성막.예배[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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