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31(양무리교회)
창세기에 심고, 출애굽기에서 거둔다.
Gen. 50.22-26
본문 분석
창세기의 요셉(110세): 17년 가나안 → 93년 애굽
또 하나의 시작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창15.13)
∙“네 자손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창15.16a)
→
∙“하나님이 …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50.24b)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창50.25)
이스라엘(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한 게 목적은 아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시작이자 출발이다. 여기에는 야곱의 12 아들들의 보이지 않는 창세기가 들어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 가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사실 창세기를 살아가는 인생은 보통 창세기에서 심고 거기에서 거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오히려 창세기에 심어서 먼 훗날 출애굽기에서 거두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만들어 가시는 특별한 어떤 인생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인생시간표다. 하지만 모두의 인생이 다 그럴까. 그렇지 않다. 이것이 요셉을 좀 더 특별하게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당대(當代): 창세기의 요셉 - 110세
[요셉연표1]
17세 – 형들의 꿈을 해석하다.
애굽의 노예로 팔리다.
28세 – 두 죄수의 꿈을 해석하다.
30세 – 바로의 꿈을 해석하다.
애급의 총리대신이 되다.
? 세 –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을 아내로 맞다.
두 아들(므낫세, 에브라임)을 낳다.
37세 – 先 7년 풍년이 끝나다.
38세 – 後 7년 흉년이 시작되다.
39세 - 곡식을 사려온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알리다.
아버지 야곱(130세)을 22년만에 다시 만나다.
야곱의 온 식구들이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하다.
56세 - 아버지 야곱이 17년 애굽생활 후 147세에 죽다.
아버지 야곱 사후에도 54년을 형제들과 함께 언약을 이루어 가다.
110세 – 애굽에서 죽다.
언약의 성취를 유언(창50.25): ‘약속의 땅에 내 해골을 가져가라.’
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을 이처럼 알린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장엄하고 위엄 있는 <창세기(創世記)>가 어떻게 된 것인지 ‘죽음’, 즉 <멸세기(滅世記)>로 그 끝을 맺는다: “요셉이 110세에 죽으매 ….”(창50.26)
하지만 요셉은 나이가 되어 자연사하는 것으로 끝을 알리는 사람이 아니다. 창세기는 이 이야기를 하려고 기록된 성경이 아니다. 요셉은 다르게 살았고, 동시에 다르게 죽는다. 애굽주의자로 살지 않았다. 그는 보이는 세상인 애굽을 따라 살지도 않았다. 요셉은 애굽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며 자신과 가족과 야곱의 후예들을 지켜는 일에 에너지를 집중한다.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유언과도 같은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애굽의 부귀영화와 권력의 힘과 명예라는 인간적인 것을 의존하지 않는다.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았더라가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애굽이 전부라면 애굽이 전성기여도 된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신 언약이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은 애굽이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요셉은 이것을 알았고 또한 믿었다. 이 소망이 창세기를 넘어 출애굽기를 바라보게 했다.
그렇다면 애굽이 희망이거나 만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요셉은 애굽이 주는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요셉으로 요셉되게 했을까? 하나님이다. 아주 단순하다. 17세의 소년으로서 꿈을 꾸었을 때에도 그 꿈을 하나님과 연결할 수 있었고, 그 꿈 때문에 결국 형들에 의해 팔리게 되고, 급기야 노예에서 죄수가 되어 감옥에 있을 때에도, 총리가 되어 부와 권력과 명예를 다 쥐고 살았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충분했다.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자신의 인생을 관통해가는 것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고, 그것만큼 바로 그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것이 110세 인생의 마지막에 토해내는 유언과도 같은 고백에 들어있는 요셉의 신앙이다.
후대(後代): 출애굽기의 요셉 – 언약의 땅 가나안까지
[요셉연표2]
[창세기]
∙110세 – 애굽에서 죽을 때, 약속의 땅에 해골을 가져가라고 유언하다(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25)
→
[출애굽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출1.8)
∙아브라함에서 시내산까지: 430년 후(창15.1-21 — [출12.40] → 출13.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출13.19)
그 요셉이 이제 애굽마저 떠나게 된다. 이때 요셉은 그의 선조들처럼 약속의 땅, 그러니까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믿음을 따라 그 땅 가나안에 대한 유언을 남기고 애굽에서 110년 생애를 마무리한다(24). 그는 창세기에서 애굽의 땅에 자신의 육신을 묻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닌 하나님이 계획하신 또 하나의 창세기의 문이 열리게 되는 그날이 오면 –우리는 그것을 출애굽기라 읽는다.- 자신 역시 해골(흔적)이나마 출애굽기의 땅에 묻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죽음 그 너머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다는 것을 안 것이다. 동시에 그 세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섭리의 영역인 것을 본 것이다. 그는 생사의 모든 것을 다 이처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그랬으니 타향 애굽에서 본향 가나안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브라함에서 시내산까지 430년이라는 언약의 역사에 모세가 참여한다(출13.19). 요셉은 창세기에 심었고, 모세는 출애굽기에서 이를 거둔다. 요셉은 심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섭리와 역사를 따라 자라다가 마침내 모세에 의해 성취되게 하신다. 요셉의 시대에 심은 소망이 드디어 모세의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적용하자면, 아버지의 소망과 소원이 자녀의 대(代)에서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우리에게 있는 소원 하나를 요셉처럼 심으면 다음세대에 그것이 모세처럼 응답하는 자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요셉처럼 살아간다면 언젠가 우리의 소망이 다음세대에 일어날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게 믿음의 가정이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소명이자 사명이다.
부스러기 묵상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요셉이 110세에 죽으매 ….”(창50.26)
창세기가 멸세기로 그 끝을 맺는다.
하지만 창세기가 정말 이렇게 끝을 맺는다는 말인가. 이러려고 창세기인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희망은 ‘여자의 후손이 올 것이다’는 언약을 따라 살아 역사한다. 이를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유다를 타고 흘러간다. 요셉 역시 이를 바라보며 해골이라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히기를 유언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는 비록 멸세기로 문을 닫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 생명(언약, 약속, 말씀)이 자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듯 애굽이라는 자궁에서 창세기가 약속하고 있는 땅과 후손의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시작은 하나님의 창세기였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인간의 멸세기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창세기가 멸세기로 끝나는 종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죽은 가지와 같은 뿌리 끝에 여자의 후손과 아브라함의 언약이라는 생명을 불어넣으신다. 그리고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의 12 아들들을 통해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행해지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회복이라는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이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으나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을 통해 창세기의 비전과 꿈과 소망을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이다. 이렇듯 창세기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 우리는 그 새싹이 마침내 출애굽기에 움트는 것을 볼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가 진행되는 곳이 비록 약속의 땅이 아닌 이방의 애굽일지라도 그곳에서 멈추지 않아야 할 요셉의 날들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이라는 척박한 한복판이 비록 우리의 삶의 무대일지라도, 이곳에서의 믿음의 경주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무엇을 말인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이것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요셉처럼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110세에 죽을지라도 말이다. 그래야 언젠가 하나님이 세우시는 모세를 통해 우리의 사명과 꿈과 소명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곳에 가 있을 것 아니겠는가. 오늘은, 그리고 내일은 그것을 위해 주신 날들이다. 2024년은 이 신앙을 따라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인생의 걸음을 나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