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5-16(묵상)
나답과 아비후, 그 이후의 교훈
레10.1-20
[구 조]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1-7): 범죄
성소 이야기(8-20): “죽음을 면하라!”
제사장의 금기와 의무(8-11): 교훈
제물에 대한 제사장의 분깃(12-15): 명령
속죄제의 분깃에 대한 토론(16-20): 모세 vs 아론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strange fire, 1)을 드린 죄는 참람죄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민16.46 참조) 제사장인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왜 모세가 그토록 8-9장에서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행하였다는 것을 강조했는지를 통찰하도록 한다. 한편 이 사건은 여호와의 임재의 영광(9.1,23-24)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나타나신 날과 동일한 날에 영광과 반대의 모습으로 발생했다.
아버지가 대제사장으로 취임하는 날에 두 아들이 죽는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이들은 모세를 따라 시내산에 올랐으며(출24.1,9), 이들은 이미 제사장이다(레8.30-36). 명령과 순종의 흐름(8-9장)이 위기를 맞았지만 다시 아론의 순종으로 회복된다.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1-7): 범죄
영광의 불이 단 위의 번제물을 사른 것처럼(9.24, 축복의 불), 몇 구절 뒤에도 ‘불’이 범죄자를 삼킨다(10.2, 심판의 불). 더구나 16장 1-2에서는 대속죄일의 주의 깊은 배경과 근거로 10장 1-2의 재난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제사장 신학의 기초가 되는 기본적 원리들을 제시하시는 기회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순종)가 아닌 예배자 임의대로의 ‘자기 식’(내가복음/제5복음서, 불순종)의 예배를 싫어하신다. 제사장의 권리 역시 하나님의 법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불’이라는 것이 그리 큰 문제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규정된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서 제사장이 이를 자의적으로 어겼다는 점이다. 즉, 다음과 같은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불신앙이 바로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 안에 흐르고 있는 죄악이다:
*아무 불이나 피워서는 안 되고 반드시 번제단에서 가져와야 한다(민16.46).
*속죄소는 아무 때나 들어가서는 안 된다(16.2).
*회막 안에서 향을 올릴 자격자는 오직 아론뿐이다(출31.1-10).
하나님의 불은 언제나 영광의 불로서만이 아닌 심판의 불로 변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명령, 율법)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렇다. 어제의 영광은 오늘의 영광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제사장이라고 예외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9장과 10장 사이에 서 계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3절 -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백성들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신다.
4절 - 왜 사촌이 장사를 지내는가? 제사장들은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정-부정의 원칙).
일차적인 우선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마8.21-22).
7절 -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특별한 기름 부으심
성소 이야기(8-20): “죽음을 면하라!”
제사장의 금기와 의무(8-11): 교훈
제물에 대한 제사장의 분깃(12-15): 명령
속죄제의 분깃에 대한 토론(16-20): 모세 vs 아론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죽지만 하나님은 계속되는 범죄로 말미암은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시는 일을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8) 이것이 성소 이야기 안에 흐르는 교훈, 즉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놀라운 것은 나답과 아비후 불순종 사건(1-8) 이후에 하나님 vs 아론(8-11), 그리고 모세 vs 아론家(12-20) 사이에 계속되는 대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몸과 마음을 다 해 순종해 내는, 그러니까 불순종(1-7)과 순종(8-20)의 두 그림이 온 이스라엘(11)에게 가르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아들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제사장인 아론과 직접적인 대화를 계속하시면서 그를 위로하신다(8). 금기(9)가 아들들의 죽음을 가져온 직접적인 이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두 아들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에 이어지는 문맥(文脈)을 볼 때 이것이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10)하는 제사장의 의무(임무)를 흐리게 한 것과 불가불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편 제사장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은 자신들에게 허락된 부분을 먹을 수 있는 분깃(2.3,10, 6.16-18, 7.30-34)이 유효한 것은 동일하다(12-15,17). 하지만 아론과 그의 남은 아들들은 백성을 위해 숫염소로 드린 속죄제의 고기를 먹지 않고 불살랐다(17). 그러나 모세는 “그 피를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였으니”(18a; 4.1-21, 6.24-30 참조) 아론家의 사람들은 성소의 바깥뜰에서 그것을, 곧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할 것”(18b)이라며, 이 규례를 어긴 아론家를 향해 노를 발한다(16b).
8절 - 오직 아론에게 명하신 것은 이곳 한 곳이다.
9절 - 갑자기 포도주와 독주인가? 나답과 아비후가 술 취하여 분향했기 때문이다(추측).
10-11절 - 제사장의 사명 분별하고...가르치라!
12-15절 - 제물의 취급; 제물을 잘못 취급하면 죄가 남아 있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이 임재할 수 없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게 된다.
16-20절 - 제물 처리에 대한 아론의 실수
장례식에 다녀와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이런 일’ 곧 아들들의 죽음이 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다(19). 제사(예배)는 그것을 명한 규례대로 드려져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진리를 아들들의 죽음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깨닫는다.
그렇다면 ‘다른 불’은 겉으로 보이는 형식(현상)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를 향한 마음과 생각이 그러했고, 그랬기에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1)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사용한 것이다. 종종 나 역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은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에서 단지 겉으로 드러난 제사가 아닌 마음으로 드리는 신령과 진리로 드려야 하는 영적예배(靈的禮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한편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를 사이에 두고 하나님-모세-아론家로 이어지는 대화가 눈부시다. 모세의 언행에서(3,4,6,12,16,20), 그리고 이를 받는 아론家의 태도에서(3,4-5,7b,8,19),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8) 문제 앞에 선 자들을 향한 목자의 모습과 그의 지도(가르침)를 받는 성도의 목양 관계의 아름다움을 본다.
이것이 때로 뒤뚱거리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광야교회](행7.38)의 멋진 모습이요 내가 꿈꾸는 교회다. 아론처럼 가슴에 못을 박는 것과 같은 고통 중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싶고(8-11), 죄가 또 다시 죄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을 이끄는 모세처럼 쓰임 받고 싶고, 오가는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건강한 공동체를 회복해 가고 싶다. 시리도록 슬픈 장례식(5,7)이지만 그 안에 흐르는 교훈이 빛난다. 온 이스라엘을 다시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모두가 다 자신이 선 자리를 지키고 있음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