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 구별이지 분리는 아니다(창 46.28-47.12).

20200918(묵상)

  

 

 

애굽, 구별이지 분리는 아니다.

Gen. 46.28-47.12

  

   본문 관찰

 

   요셉이 가족을 맞다(46.28-34)

   요셉 가족이 바로를 만나다(47.1-12)

   

 

고센 정착

 

마침내, 그리고 얼마만의 부자(父子) 상봉인가.

요셉 나이 17세에 헤어져 그의 나이 39세 때였으니 다시 만나기까지 그 안에 무려 22년이라는 세월이 들어있다. 요셉은 이번에도 얼마 동안 운다(29). 흥미로운 것은 그의 눈물은 항상 가족과의 사이에서 터져 나온다. 아버지 야곱 또한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30b)라고 말한다. 물론 그러고도 17년을 더 살지만 말이다. 이렇게 아브라함 언약은 조금씩 성취 쪽으로 움직인다.

 

 

애굽 언약과 그 성취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12.7a)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15.7)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한 땅은 가나안이다. 한 때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12.10- ), 그때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위를 원치 않으셨다. 또한 이삭에게는 이를 금하셨다(26.1-5). 그런데 지금 야곱(이스라엘)은 가나안이 아닌 애굽으로 이주하고 있다. 그것도 야곱의 애굽행을 추인하시는 모양새이지만 두려워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제사(예배)와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자리한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야곱과 그의 온 가족들이 애굽으로 향한다(46.1- ). 이것은 좀 더 이해해야 할 내용이 있다.

애굽과 관련하여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상반되는 말씀을 하셨다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경 안에서의 불일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실(아브라함 언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15.13-18)

 

그렇다면 왜 애굽인가? 답은 아브라함 언약에 들어있다. 이렇듯 지금 이스라엘의 애굽(애굽)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와 연결된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4(四代)에 걸쳐 애굽에서 살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 언약이 요셉과 연결되어 있고, 마침내 야곱과 그 후손들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갖는 하나의 의문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인도하시는가? 400년 후에 정확히는 430년이다(3.17 참조)- 다시 출() 애굽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이 아닌가? 어차피 약속의 땅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인데 왜 가나안을 얻는 것을 애굽살이를 지나 430년 후의 일로 작정하시는가?”

이러한 질문 역시 성경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를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데, 지난 시간 본문이 이를 분명히 해 주었다.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46.3-4)

구약성경 가운데 특별히 출애굽기와 시편에서, 그리고 신약의 스데반 역시 그의 설교에서 큰 민족을 이룬 이후에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됨을 각각 증거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1.7,12)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나그네가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을 크게 번성하게 하사 그의 대적들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또 그 대적들의 마음이 변하게 하여 그의 백성(百姓)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교활하게 행하게 하셨도다.”(105.23-2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7.17)

 

이렇듯 한 가문에 불과한 70여명의 사람들이 이미 가나안에 정착하여 큰 세력을 이룬 족속들을 상대로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야곱의 아들의 대()에서 벌써 심각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음에서 그 기대는 더 멀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야곱의 아들들의 대()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에게 나타나셨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현현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됨의 증표인 할례는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서 살인의 도구가 되었으며(34),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범죄를 저질렀고(35.22),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던 요셉은 애굽으로 팔리는 것(37.36- )을 시작으로 야곱의 아들들은 함께 살지 못하고 서로 흩어지면서 실질적인 장자의 역할을 하였고, 메시야의 계보를 이어갈 유다는 며느리를 통해서 아들을 낳게 되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는(38) 등 야곱 이후의 구속사는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렇듯 유다의 몰락을 보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희망 역시 몰락할지 모르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야곱은 아들들의 대()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것을 그저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영적인 중심을 급속하게 잃어가는 이스라엘과 그 아들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럴수록 하나님이 요셉을 비밀병기로 준비하고 계셨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요셉이 그 가족을 애굽에서 맞이하는 이야기의 내면이다(46.28-34).

   

 

요셉 가족이 바로를 만나다(47.1-12).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7b)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9)

   ▪라암세스(11) 핍박과 출애굽의 깃점(1.11, 12.37, 33.3,5)

 

놀라운 것은 애굽이 목축업을 가증하게 여기는 것이 이스라엘(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거주하지만 그러나 애굽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이 아닌 고센(라암셋; 5,11)에 거주하게 되는 것으로 선을 이루신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요셉의 지혜가 빛난다. 비록 고센은 애굽(세상)의 중심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없는 문화와 번영이라는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환경으로부터 구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이 정착을 시작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어가기에는 최적이어서다.

요셉은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보다 애굽을 잘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살아가야 하는 보다 장기적인 삶의 여정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세례 요한이 이를 위해 광야에서 산 것과 같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구별된 자로서, 동시에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동일하게 살지 않는 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분리된 자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빛과 소금으로 사는 소명자다.

야곱 역시 바로(세상) 앞에 당당하다. 세상의 중심인 바로 앞에 서 있지만 바로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먼지와 같은 존재이기에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로를 축복한다(7b). 비록 그의 호의와 보호 아래 머물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애굽에 복을 베푸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서다. 이 영적 원리를 잊거나 혼돈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야곱을 보라.

사실 야곱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지금 그는 당면한 기근(흉년, 죽음)의 위기 앞에 홀로 외롭게 서 있다(42.1- ). 태어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사람, 그러나 형과 아버지와 하나님마저 속이고서 자신의 꿈을 성취해 보려고 발버둥 친 사람, 그러나 그 역시 외삼촌 라반과 아들들로부터 속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은혜를 체험한 그였다(32).

그러나 그는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라도 하나님이 한 사람 요셉을 준비하고 계신 22년 동안이나 요셉의 존재 그 자체마저도 잊고 살았을 뿐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우리에게 알리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경륜을 알 수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전개되고 있다. 하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역사 앞에 참여할 것 밖에는 다른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일이 밝히 드러나면 , 하나님이 이루셨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야곱의 일생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다.

야곱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 자신도 모르게 요셉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일 앞으로 나아가는 야곱의 마음을 어떠했을까? 영적으로든, 소유로든, 가족을 거느린 규모로든 천하의 야곱이다. 그러나 그가 가진 모든 것은 자기 목숨 하나 건사할 수 없다. 잃어버렸고, 죽었다 생각했던 요셉이 이를 주도한다. 그리고 야곱은 이를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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