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의 꿈(창 41.1-16)

20200906(묵상)

  

 

 

바로의 꿈

Gen. 41.1-16

  

   본문 분석

 

   요셉의 꿈

   꿈 + 해석(37.7,9): 요셉 -×요셉

       →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는 언급이 없다.

             (꿈 이후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성취(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42.6)

      → 그들이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43.26)

      →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44.14)

      → 아브라함 언약(15.12-21)

      → 17() -13- 30/총리 -9- 39/흉년 2년차 성취(22년 후)

 

   신하들의 꿈

   꿈(40.9-11,16-17)

   해석(40.8): 하나님 -요셉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 술 관원(40.12-13)

       → 떡 관원(40.18-19)

   성취(40.21-22)

 

   바로의 꿈

   꿈(41.1-7)

   해석: 하나님 -o→ 요셉

       →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25,28)

       →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32)

   성취(41.46- )

   

 

13년 동안의 고독

 

요셉이 애굽에 팔려 올 때 그는 17세 소년이었다(37.2).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된 때는 그의 나이 30세였다(41.46). 그렇다면 그는 자그마치 13년 동안을 노예와 종으로, 그리고 감옥에서 보낸 셈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세월을 이처럼 불행하게 지냈다. 한편, 긴 싸움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가? 그렇게도 몸부림치며 버티어 온 지난 수 년 동안의 시간이 이렇게 일단락 된다는 말인가?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바로 앞 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더라.”(40.23)

 

세상은 그의 존재를 잊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 역시 형들의 보고대로 그가 동물의 밥이 되어 이미 죽은 줄로만 알고 있다. 이처럼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없는 것 같다. 하나님에게마저도 잊혀진 자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그는 이제 감옥에서 끝날지도 모르는, 그래서 별 볼 일없는 사람이다. 감옥에 갇힌 죄수 요셉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사람이다. 한 사람의 몰락(추락)이 이런 것일까? 하지만 놀라운 것은 요셉이다. 그는 13년 전이나, 지금 13년 이후나 요셉이다.

   

 

1. 요셉의 13년을 추적해 본다.

 

우리가 앞서 읽은 대로라면 이 기간이 결코 만만한 기간이 아니었다. 그의 모든 것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꿈을 꾸며 채색옷을 입고 살던 생활에서 일약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하염없이 추락하였다. 그는 이러한 외적 환경과 싸워야 했고, 또한 동시에 무엇보다 자신 안에 주셨던 하나님의 꿈을 붙들고 승리해야 하는 내적 전투에도 임해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요셉을 위협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간다. 요셉의 13년 동안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39-40장은 이렇게 그의 일생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1) 창세기 39

*2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3 -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9 -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21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3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2) 창세기 40

*8 -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8 -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2. 2년 후에(1)

 

요셉의 나이 30세가 되는 해다. 창세기 40장과 41장은 만 2년의 시차가 있다. 2! 긴 시간이 아닌가. 마침내 가 왔다. 하나님이 자신이 꾼 꿈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꿈을 꾸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그럼 그 꿈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요셉이 할 일은 무엇인가. 그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는 육신의 열매를 맺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7-9)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았다. 환경은 그를 고난과 고통으로 몰았다. 점점 꿈과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것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험난하고 고독하고 외로운 13년을 묵묵히 인내하며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자기 마음대로 수정하기를 거부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역사하시기 전에 먼저 행동하기를 거부하였다. 아무리 감옥생활이 길어지고, 소망과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일지라도 자신의 미래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 보려는 그 어떠한 노력도 거부하였다. 술 맡은 관원장은 혹시 요셉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요셉을, 요셉은 하나님을 결코 잊을 수 없음을, 그랬기에 만 2년이나 되는 계속된 감옥생활도 그에게는 아무 문제일 수 없었다.

 

(1) 사실 야곱에게는 이미 꿈과 관련된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이 둘 다 아직까지는 씁쓸한 기억 밖에 주지 못하였다. 첫 번은 그가 17세의 소년으로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 직접 꾼 꿈이다(37.1-11). 우리가 아는 대로 이 꿈은 그를 13년 동안이나 고난과 고통 속으로 집어넣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뿐 최소한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결코 유익해 보이는 꿈이 아니다.

두 번째는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2년 전에 바로의 신하들의 꿈을 해몽한 경험이다. 요셉은 2년 전() 신하들의 꿈을 해석해 주고 그 술관원의 도움을 통해 뭔가 일이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2년이 지났다.

이렇듯 첫 번이나 두 번째나 모두 요셉에게는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런데 정작 요셉은 꿈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회의하거나, 불신하거나, 거부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만약 그가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꿈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바로의 신하들의 꿈을 들었을 때 이처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40.8)

 

그리고 그는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모든 은혜를 다 잃어버렸을 것이다. 마치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능력을 잃어버린 삼손이 그것도 모르고 행세하다가 패가망신(敗家亡身)했던 것처럼 그도 정작 꿈을 해석하려고 했을 때 전혀 아닌 모습으로 땀만 뻘뻘 흘리고, 고개만 갸우뚱거리며, 얼굴은 빨개지고, 머리만 굵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2) 13년의 고독은 요셉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끝나고 있다. 동일한 의미에서 요셉은 두 번씩이나 메아리 없는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자리에, 그러니까 바로의 신하들의 꿈을 해석한 지 2년 후에도 역시 전혀 변함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세 번째 꿈 앞에 서게 된다.

하나님의 공식은 이것이다. 마치 모세 자신이 일하고 싶을 때는 광야로 그를 몰아내사 40년을 연단하셨던 것처럼, 신하의 꿈을 해몽하고서 그것을 의지해서 뭔가 작품을 만들고 싶을 때는 2년이나, 아니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지난 13년이나 요셉을 연단하셨다.

이제 그는 한 개인이 아니다. 자신의 꿈에서 바로의 신하 두 사람의 꿈으로, 그리고 이제는 바로의 꿈, 그러니까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8,15) 애굽의 꿈을 해몽하는, 하나님과 바로의 대결을 위해 쓰임 받는 자로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던 것처럼- 자신과, 애굽과, 아버지 야곱과 자신의 온 혈육까지를 구원하는 자로 하나님이 그를 세상 앞에 당당하게 세우신다.

   

 

바로의 꿈

 

하나님은 요셉을 위해 애굽왕 바로까지 사용하신다.

그것은 바로가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는 그 꿈 때문에 번민한다. 그는 꿈을 꾸게 되었을 뿐 다른 아무 것도 거기에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인생들에게 알리신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둔한 인생의 생각과 지각과 지혜와 심령을 밝히 인도하시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바로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총 밖에 있다. 그는 보았으나 모르고 있고, 꾸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있고, 위로부터 하나님의 어떤 계시가 임했으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 세상에는 바로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살 수 없으나,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이 바로가 아니고 누구인가.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다 그릇 행하여 사망의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 그럼에도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신기루를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 세대의 바로들이다.

 

1.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

 

꿈과 그 성취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변하지 않는 믿음은 바로를 통해 꿈을 듣자마자 아무 주저함 없는 고백에서 절정을 이룬다(16):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시리이다.”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25,28)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32)

 

(1) 하나님이 대답을 하시리이다. 요셉은 이 기준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바로의 두 관원장들과 바로-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한다. 어느 인생도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거나, 만들 수 없다. 인간은 아무도 자신의 시간표를 임의로 조정, 수정, 첨가, 삭제, 조작할 수 없다. 하나님이 바로의 꿈을 주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 자신의 꿈 역시 주도권을 잡고 계신다는 말과 같다.

요셉은 지난 13년동안이나 이 사실을 신뢰하였다. 그것도 노예와 종의 모양으로 낮아진,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감옥에까지 미끄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제는 꿈에 대해서 이처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을 법도 하지 않은가. 나 같으면 이미 오래 전에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애정을 붙들고 있었다.

하나님은 요셉이 17세였을 때 단 한 번 그에게 꿈을 주셨을 뿐이다. 그가 외롭고, 지치고, 피곤하고, 힘들 때 다른 꿈에 나타나셔서 그를 격려하시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넓은 팔 만 벌리고 그를 보호하고 계셨을 뿐이다. 오직 요셉 그만이 하나님을 그토록 13년동안이나 짝사랑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으나 요셉은 오랫동안 인내하였다. 그는 13년을 오래 참았다. 어떻게, 왜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2) 술 관원은 오직 애굽과 바로의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한다. 이들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오직 자기들의 문제만을 보고 있다. 요셉을 돕고, 그를 위해 어떤 공헌을 하거나, 과거에 진 어떤 빚을 갚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다. 세상은 철저히 자신의 생존과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요셉을 잠깐 활용하려고 한다.

자신들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기독교라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사람 요셉과 잠깐 파트너쉽을 이룬다. 언제나 일은 이처럼 시작되고 진행되는 경향이 많아 보인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는 싫은데 남자는 괜찮아서 그를 배우자로 삼는다. 공부는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교회나 기독교 기관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한다. 기독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전공과 여러 여건 때문에 기독교학교에 입학을 한다. 속는 셈치고 교회에 한 번 가 준다. 큰아들이 기독교라 어쩔 수 없이 기독교식으로 장례식을 치른다. 이것들은 다 요셉이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이 아니라 요셉이 꿈을 잘 해석한다는 것 때문에 바로가 그를 필요로 했던 것과 같은 경우들이다.

 

(3)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라. 이처럼 처음에는 그냥 단순히 시작된다. 요셉이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아니 당사자인 요셉조차도 바로의 꿈 해석과 그 이후를 알지 못하는, 그런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신다. 이것이 요셉 이야기 그 중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마치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 서도록 거기까지 그를 몰아 가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마침내 요셉을 바로 앞에 세우신다. 이제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감옥에서 잠시 나온 외출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 것인가? 그는 바로 신하들의 꿈을 해몽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요셉에게는 하나의 사건이 시작되었다. 바로 앞에 선 요셉, 그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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