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는 자, 요셉(창 37.12-36)

20200811(묵상)

  

 

 

팔리는 자, 요셉

Gen. 37.12-36

  

   본문 관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19)

   우리(20): 그를 죽여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유다(26):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우리(32):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32)

   그의 아버지(35):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요셉에게 길을 찾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세기 39:23)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49:22)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이 차꼬에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05.17-19)

   

 

요셉서론: 요셉행전 맥잡기

 

[1] 아버지 야곱

 

*요셉 출생(30.22-25) - 야곱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정하다.

*(31.11- ) -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외삼촌 라반과 20(31.38)만에 가나안으로 돌아가다.

*얍복 나루터 사건(32.24- )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새롭게 되다. 마침내 영적 거장으로!

*딸 디나의 강간과 세겜의 남자들을 할례 중에 몰사시킴(34.24-31) - 시므온, 레위

*다시 벧엘로 올라가다!(35)

  -벧엘 언약(10-12)

  -베냐민이 태어나고, 라헬은 죽다(16-20).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하다(22).

 → 그리고 37장에서 요셉이 사라진다.

 → 이 대목에서 창세기 독자들은 놀란다. 뭐냐? 아브라함-이삭-야곱, 그리고 그 다음에 누가 설 것인가가 전혀 예측 불가능하다. 아들이 12명이나 되는데 말이다.

 → 그런데 다음 유력자인 유다? 그가 38장에서 휘청거린다.

 

[2] 아브라함 이삭 야곱 ? 하나님의 비밀병기!

 

보통의 상식에서는 장남 르우벤이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의 서모인 빌하의 침상에 오른다(35.22). 당시의 통념상 장남이 잇는 것이고, 무엇보다 르우벤은 이를 자신의 힘과 방법대로 드러내고 확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42장까지 계속되는 듯하다.

그리고 둘째와 셋째는 시므온과 레위(34), 아버지 야곱이 심정적으로 장자권을 잇고 싶어하는 요셉은 사라진다(37). 그리고 유다는 38장에서 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 쌍둥이를 낳는다. 이들 중 베레스가 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다말)-베레스-헤스론--아미나답-나손-살몬(라합)-보아스()-오벳-이새-다윗-솔로몬-르호보암- ... -요셉(마리아)-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메시야의 조상이 된다.

자 이쯤되면 우리는 두 가지 질문 앞에 선다. 첫째, 그럼 요셉은 무슨 역할인가? 이는 유다가 성경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 오는 질문이다. 둘째, 동시에 그럼 유다는 어떻게 야곱의 뒤를 잇는 구속사의 족보에 오르게 되는가?

 

[3] 창세기의 관심은 아브라함-이삭-야곱- ... 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족보다.

 

창세기 11장부터 보자. 아담-- ... 노아--아르박삿- ... 나홀-데라-아브람/나홀/하란 ... 그런데 여기 셋 가운데 아브람이 족보를 잇는 것은 아버지 데라나 아브람 자신의 의도가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에서였다(7.1-4, 12.1-3). 그리고 창세기에서 좀 정리해 보자. 다 하나님이 하신다.

데라 아브라함-엘리에셀():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15.2).

            나홀        이스마엘(하갈): 이스마엘이나 하나남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7.18).

            하란    → 이삭(사라)-에서(25.23):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그럼에도 이삭은 끝내 에서를 축복한다(27).

                                        → 야곱 르우벤/시므온/레위...

                                                       요셉

                                                   → 유다

 

[4] 그렇다면 요셉은 무슨 역할인가?

  

이게 앞서 첫 번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는 요셉의 증조부 아브라함언약’(15)으로, 그리고 아버지 야곱과 맺은 벧엘언약’(35)으로 올라간다. 야곱의 12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듣고 알고 배우며 자랐다. 무엇보다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은 이미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지낸 20년 동안의 생활에서, 그리고 얍복 나루터를 건넜던 아버지의 영적 체험에서, 벧엘에서 다시 찾아오신 하나님의 임재에서 하나님은 이미 야곱과 그 아들들 안에 생생한 역사였다.

그 역사에 반응하고 있는 사람, 그 역사에 하나님으로부터 주목을 받는 사람이 37장부터 요셉이다. 그렇다면 요셉은 지금 단순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 앞에서 얘기한 하나님의 역사를 야곱 다음으로 이어지게 하는 자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문제는 10명의 형제들은 이 일에 관심도, 통찰도,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고자 하는 역사에 무지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요셉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일과 연동되고 있다.

그럼 무엇인가?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통해 듣고 배우고 믿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고, 그 언약이 자신에게 꿈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실 하나님을 바라 본 것이다.

 

아브라함언약(15.13-17)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벧엘언약(35.9-13)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6] 요셉 연보(창세기 37-50)

 

17(37.2,28) - 꿈을 꾸다. 애굽의 보디발에게 종으로 팔리다.

   > 11

28(40.1, 41.1) - 바로의 두 신하의 꿈을 해석하다.

   > + 2= 13

30(41.1,46) -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총리가 되다.

   > +8(풍년 7+ 흉년 1) = 21

38(42.5-9) - 흉년 1년에 형들을 만나다.

   > +1(흉년 2) = 22

39(45.6; 41.29-30 참조) - 흉년 2년에 형들에게 자신을 알리다.

39(46.29) - 아버지 이스라엘과 만나다(22년 만에).

   > 아버지 야곱이 130세 애굽에 와, 147세에 죽다. 그럼 요셉 56세 때다.

110(50.22,26) - 죽음

담을 넘는 인생(49.22, 50.25, 13.19, 24.32) - 유언의 성취

 

[7] 17

 

하나님이 요셉에게 장차 그의 인생을 견인할 위대한 꿈을 주신 해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 때문에 형들의 표적이 되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는 때다.

오늘 묵상 창세기 39장은 그로부터 10년 여 세월이 지난, 그러나 그의 나이 28세가 되기 조금 전인 그런 시기다. 하지만 그가 10여년 전에 꾸게 되었던 꿈과는 어떤 연관(연속성)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시각은 좀 다르다. 그게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곳이 바로 창세기 39장이다.

요셉에게서 놀라는 것은 시계 제로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점이다. 17세에 꾼 꿈과 어디 하나 연결될 조각구름 하나 없음에도 말이다. 노예와 감옥의 죄수에게 임마누엘이고, 또 형통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임에도 말이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뭔가 자신의 꿈과 야망을 이루기에 혈안이 되어 신앙까지 동원하는 삼류인생들이 판치는 때에 요셉이 커 보이는 이유는 뭘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흔들림 없는 삶을 견지한다. 인생막장에서 말이다. 나는 과연 요셉처럼 살 수 있을까?

요셉행전의 파란만장한 13년의 기나긴 고독, 하지만 17세의 소년으로서 애굽의 노예가 된 후 13년이라는 요셉 시간표는 이상하리만큼 평화롭다. 핵심은 요셉이 결코 흔들림 없음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에서 종으로!

 

마침내 12 아들들 사이의 갈등이 폭발한다.

동시에 야곱은 아들들에게 속음으로써 지난 날 그가 형을 속였던 과거와 묘하게 대비된다.

다 잘 있는 여부’(14), 샬롬을 보고 오라고 했으나 아들들은 평화를 깬다.

   

 

인신매매(人身賣買)

야곱타령

 

아버지 이삭은 야곱을 깊이 더 사랑함에다 유독 채색옷까지 입힘으로써 이를 표현한다(3-4). 형들이 다 양을 치는 목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다 양치기 복장이었을 것이다.- 일꾼의 이미지이고, 반대로 요셉은 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니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도련님의 이미지다. 거기에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태도까지 더해져서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가는 대화가 평안하지도 않았다.

그런 요셉이 그 모습으로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왔다. 이때 형들은 같은 마음이 되어 이렇게 말한다: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19) 이 말은 조롱이고, 더 깊게는 그를 죽이기로 결의한 암호와도 같았다. 그러니까 요셉을 죽이겠다는 것은 그의 꿈을 없이하겠다는 말이다. 그럼 이 언행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언약하신 섭리(계획)을 무력하게 하겠다는 말 아닌가. 형제간의 불화와 미워하는 분노는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자라가기 시작한다. 창세기 기자의 통찰을 보라:

 

   “,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20)

 

이때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려 했으나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번에는 유다가 죽이지 말고 그를 20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28) 갔고,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31) 이를 아버지 야곱에게 가져감으로써 요셉의 사망 소식을 거짓으로 아버지에게 알린다.

여기서부터 요셉이 흉년 2년차에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는 때까지 22년 동안 요셉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다. 요셉은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리는 자’(25-28)가 되어, 다시 이들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36).

   

 

부스러기 묵상

 

이제 우리는 실상은 살았으나 창세기의 독자들에게는 죽은 자인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갈 것이다. 그는 어찌 될 것인가. 요셉이 아니어도 야곱에게는 11 아들이 더 있잖은가. 그 하나 없어졌다고 흔들릴 그런 창세기는 아니어서다. 물론 구속사의 이야기는 결국 12 아들 가운데 유다를 통해서 여자의 후손’(3.15)의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이다. 그럼 요셉은 누구인가. 이것이 창세기 37장부터 창세기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이 차꼬에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05.17-19)

 

요셉이야기의 서론과도 같은 37장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형들과 아버지에게 요셉은 죽은 자다. 그러나 요셉은 살아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형들, 그러나 죽었다 하는 증거는 있으나 실상은 살아있는 자인 요셉,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이루어가실까. 하나님은 당신이 이루어가실 이야기를 요셉에게 맡기신다. 그를 믿으신 셈이다. 그에게 창세기를 통해 성취하실 달란트를 맡기신 셈이다.

이제 요셉은 그가 맡은 달란트를 가지고 일을 할 것이다. 과연 1 달란트 맡은 종처럼 할 것인가. 아니면 2 달란트나 5 달란트를 맡은 종처럼 맡긴 자의 뜻을 이루어 드릴 것인가. 정작 하나님은 직접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소명과 사명의 짐을 지워주시지 않으신다. 그러니 이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조차 알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어지는 행보가 어찌될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면 요셉의 생애가 우리네 인생행로가 아닌가. 그 요셉의 실상이 이렇듯 종으로 팔려있고, 동시에 그의 발이 차꼬에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묶여있는 상태인 것처럼 우리의 현실 또한 하나님이 지워주신 소명을 맡은(받은) 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하나님과 거리가 있어 보임에서 그렇다. 현실을 보면 암담하지만 그러나 그런 바닦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야기를 이루어가신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요셉의 모습이다.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요셉! 이것이 요셉행전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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