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송아지 후폭풍(출 33.1-11)

20211017(묵상)

   

 

 

금송아지 후폭풍

Ex. 33.1-11

 

    본문 관찰

 

    入가나안 약속(1-2)

    하나님의 동행 거부와 이스라엘의 반응(3-6)

    회막을 지은 모세(7-11)

  

 

금송아지 사건, 그 이후

 

    언약 파기: 금송아지 숭배(32.1-6)

    하나님: 언약 파기에 대한 위협(32.7-10)

    모세: 중재자(32.11-35)

    언약 갱신: 새 돌판, 시내산 현현, 가나안 동행 약속(33.1-34.28)

 

금송아지 우상숭배가 남긴 여진(餘震)이 심상찮아 보인다.

이스라엘의 죄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고(32.33), 때문에 죄를 보응’(32.34b)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경고는 가나안을 향해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할 이스라엘을 긴장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 와중에 가나안, 바로 그 땅으로 올라가라!”(1b)는 긍정적인 명령이 다시 주어진다(1-2).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터진다.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지 않으시겠다 하신다(3). 여기에 대한 백성들(4,6)과 모세의 반응(7-11)이 금송아지 사건 이후를 좀 더 민감하게 살피도록 만든다. 마침내 금송아지 우상숭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가나안으로 가라, 그러나?(1-6)

 

    “너는 백성과 함께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1,3a)

 

금송아지 사건으로 야기된 언약의 파기는 모세의 중보기도에 의해 가까스로 복원된 듯하다(32.33-35). 하지만 하나님의 상한 감정은 아직 미열(微熱)처럼 남아있다. 이것이 언약 파기로 야기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긴장을 다룬 32장의 분위기다. 과연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늘 그렇듯 문제에 대한 해법(해답)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을 말씀하신다(1-2): “너는 백성과 함께 그 땅으로 올라가라!”(1)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은 함께 가지 않을 것을 선언하신다(3). 이것이 언약이 깨지고(32.1-20), 그런 다음 그 언약이 다시 재체결(34.1-28) 되는 그 사이에 들어있는 33장이라는 시한폭탄이다.

하나님이 부재하신 것 같은 이스라엘의 그릇된 반응(32.1)은 결국 하나님의 부재 상태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출발해야 할 상황으로 비화되고 만다(1,3a). 하나님의 부재는 곧 이스라엘의 진멸을 뜻하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 즉 교만한 자들이기 때문이다(3b). 역설적이게도 저희가 하나님이라 불렀던 금송아지도 부재 중이고(32.20), 애굽 때부터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도 부재하시겠다 하시니 이스라엘은 이제 자신들만으로 약속의 땅을 향해 올라가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준엄한 말씀’(4a), 즉 재난의 말씀(distressing words, NIV)이자 슬픈 말씀(sad words, NASB)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4)였으니 이는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5)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셨기 때문이고, 이때 저희는 그 말씀에 순종한다(6). 단장품이 금송아지가 되었기 때문에(32.2-4)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였을까. 이것은 이스라엘이 노중에서 진멸될 수 있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해 주시는 거듭된 경고(yellow card)였다. 하나님의 심장은 여전히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 넘치고 있다.

   

 

회막을 지은 모세(7-11)

 

모세의 회막’(만남의 장막)은 성막은 아니다. 성막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35장에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 나오는 회막은 무엇일까. 이스라엘이 출애굽(1114) 후 시내산에 도착한 것은 출애굽 13월이고(19.1), 다시 시내산을 출발한 것은 출애굽 221일이다(10.11). 그리고 성막이 완성된 것은 출애굽 211일이다(40.2). 그렇다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 도착하여 40일을 하나님의 산(시내산, 호렙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으니까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은 대략 4-5월에 해당한다.

한편 십계명 두 돌판을 다시 받은 것 역시 모세의 회막’(7-11) 이후다(34.1,29). 그렇다면 이 회막은 십계명이나 법궤를 모시기 위한 성막(35-40) 이전 형태의 임시적인 장막이라고 보기에도 적절치가 않다. 그럼에도 모세는 진 밖에 회막을 쳐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도 친구처럼 모세와 그곳에서 만나셨다(9,11).- 있고, 하나님 편에서도 아무런 이의가 없으시다는 점, 여러모로 특별하다. 그래서 더더욱 이 모세의 회막은 왜 만들어졌고, 그것의 목적은 무엇일까가 궁금하다.

원래 진 안이 거룩하고 진 밖은 속되다. 그런데 지금 모세는 바로 그 진 밖에장막을 친다(7). 이것은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을 통해 이미 진 안이 속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여곡절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분노)는 일단 중대한 고비는 넘겼으나 언약이 다시 회복된 것은 아니다(32.25-33.6; 34.10 참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임재는 계속되지 않을 수 있다는(3a), 그렇다면 여전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3b)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때다.

아마도 모세는 여기서 비록 진 밖일지라도 -‘진 안은 이미 거룩을 잃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한 이스라엘과 거룩한 하나님이 만난다는 것은 곧 부정한 쪽의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임재를 멈추지 않게 해야 할 급박한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금송아지에 연루된 자는 전체 이스라엘 중 3천명이었다는 점, 때문에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7b)는 흔들림 없이 여호와의 임재 앞에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이유들이 모세의 장막이 만들어진 이유가 아니겠나 싶다.

놀라운 점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진 밖일지라도 모든 백성들이 다 보는 앞에서(8,10) 당신의 임재를 앙망하는 자들에게(7b), -특히 모세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신다(9,11). 비록 그 임재의 장소(자리)가 성막(35-40)이 아닌 모세의 회막이라 할지라도, 즉 문맥상으로 볼 때 모세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만든 개인적인 장막일지라도고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을 앙망하는 자들을 찾아오신다(9b,11).

이로써 하나님의 부재(3)에 대한 가능성이 아직 유효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7-11)가 중단되지 않음에 따른 하나님의 은총의 회복은 여전히 열려있다. 이로 보건데 모세의 탁월함은 상상 그 이상이다. 그는 비록 금송아지를 통해 시내산 아래가 부정하게 되었을지라도 시내산의 거룩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도 아직 유효함을 리얼하게 드러낸다. 비록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거두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아직 거룩으로 가는 길은 차단되지 않았다는 점,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이 정말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신은 물론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생생하게 경험토록 한다(7-11). 모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수(高手)라는 점, 정말이지 배울 게 무궁무진(無窮無盡)하다.

   

 

부스러기 묵상

 

과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여전히 함께 하실 것인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3a)라는 최후통첩(最後通牒) 앞에서 이 질문은 예사롭지 않은, 그냥 한번 던져보는 그런 태평한 질문은 아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이 부재(不在)하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그렇게 되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어찌할까. 이에 대해 백성들은 백성들대로(4-8,10), 모세는 모세대로 급박하게 움직인다(9,11). 이제 백성들은 다른 사람에게 향했던 칼(32.25-29)을 자신들에게 겨눈다(4-11). 그리고서 부재(3)와 임재(7-11) 사이에 서 계신 하나님께 온 몸을 던져 긍휼과 자비를 구한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임재 중이시다. 이것이 모세의 장막(회막)이 보여준 또 하나의 희망의 신학(神學)이다. 점차 하나님 편으로 다시 이동해가는 백성들의 모습이 알차다. 금송아지를 숭배함으로써 하나님과 맺은 언약(19.1- )을 파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추락케 했던 자들을 제거하고(32.26-29), 하나님의 부재선언(3) 앞에 모든 단장품을 제거하고(4-6), 모세의 장막에 임재하신 하나님 앞에 모든 백성이 나아가 하나님을 경배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금송아지의 아픔을 씻고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일이 여기에 이르도록 생명을 건 헌신에 온 몸을 던진 모세(32.30-32), 그에게서 비록 백성(성도)들이 어떤 추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그들을 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목회자의 마음을 배운다. 한편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기의 때에도 하나님과의 교제의 끈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영적(靈的) 파도타기를 즐기는 모세가 부럽다. 조금만 컨디션이 아닌 것 같으면 움츠러들기에 바쁜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지 싶다.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은 늘 아름다운 일이다. 그것도 남(다른 사람, 이웃, 성도)을 위해 온 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에게는 섬세함 못지않은 포근함이 느껴진다. 불의(不義)와 불신앙(不信仰)에 대해서는 일점 타협이나 양보 없이, 그러나 비록 죄 가운데 떨어졌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주의 백성임을 잊지 않고, 저들을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사랑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읽어내게 한다.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11b)

 

또 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는 여호수아다. 지금의 시점이 출애굽 13(19.1), 그리고 40일이 지난 때다(24.18). 그러니까 광야 40년의 역사 중 첫 해 4-5월쯤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부터 여호수아가 모세 곁에 서 있다(11b). 그는 이미 모세와 한 길을 가기로, 아니 하나님 편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승부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이때부터 40년을 하루같이 모세 곁에서 그를 돕는 역할을 맡는다.

출애굽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은 -어쩌면 이스라엘 역사는 여기서 끝나고 모세를 통해 다시 시작될 수도 있었다(32.10).- 이스라엘,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 중심에 서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고 있는 모세, 그리고 이 모세를 돕는 여호수아, 다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서 경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이렇듯 이스라엘은 다시 희망이 보인다. 놀라운 것은 여호수아가 40년을 이처럼 모세와 더불어 그 곁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이다. 미래는 이처럼 밝다. 무릇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늘 이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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