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순종할 때에 일어나는 일들(행 25.1-27)

20251214(양무리교회)

 

 

 

순종할 때에 일어나는 일들

Acts. 25.1-27

 

 

    본문 관찰

 

    바울과 베스도(1-12)

    바울과 아그립바(13-27)

 

 

바울, 기다림의 영성

 

    “이태(2)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24.27)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유대 총독이 바뀐다.

그 사이에 바울은 여전히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이나 연금 상태다(24.23,27). 여기에는 유대인들과의 불화를 원치 않았던 벨릭스의 정치적 계산이 들어있다(24.27). 새 총독 베스도 역시 유대인들의 요청대로 바울을 다시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세우려고 한다(24.27b, 25.9a). 베스도 역시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경색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다(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다(8,10-11).

 

 

바울과 베스도(1-12)

 

    “1 (이태가 지난 후)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7 유대인들이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8 바울이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9 베스도가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심문을 받으려느나

   11 바울이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바울을 죽이겠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2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23.12-15, 24.27a). 이 긴 시간 동안에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한 일은 바울을 고소할 여러 가지 죄목들을 찾아내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바울 죽이기의 증거는 그리 신통치 못했다(7). 이들 모두가 다 바울에게서 어떤 허물을 찾아서, 그래서 바울을 죽이려고 하지만 그러나 바울은 당당하다. 율법과 성전과 가이사에게나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8).

 

그럼에도 바울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쪽으로 결정이 된다면 노중(路中, 3)에서, 혹은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9)에 따라 죽을 수도 있었다. 바울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바울이 염려한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그것은 [로마행전]이라는 복음이 막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11b)라고 선언한다(19.21 23.11 25.11).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지난 2년 동안의 가이사랴 감옥생활을 로마로 가기 위한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의 오늘 현재는 고난이고 감옥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 주님이 일하시고 계심을 믿는 일에 흔들림이 없었다. 무엇보다고 ‘2’(24.27a)이라는 세월을 말이다.

 

 

바울과 아그립바(13-27)

 

    “13 수 일 후에 아그립바가 가이사랴에 와서

      21 베스도가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22 아그립바가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25 베스도가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13

      – 아그립바: 헤롯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

      - 버니게: 아그립바 1세의 장녀

 

베스도 역시 바울의 죄()에 대해서 아무런 혐의도 찾지 못했다(18,25). 사실 총독 베스도는 문제의 핵심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유대인의 입장과 바울 복음의 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19). 하지만 베스도 총독 역시 정치적 선택을 앞세운다.

 

이로 보건데, 베스도와 아그립바 역시 진리와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결국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생길 수 있는 어떤 문제로 로마 황제에게 책잡히지 않으려는 생각 뿐이었던 것이다(26). 한 영혼이 아무 죄 없이, 그것도 2년이 넘도록 옥살이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부스러기 묵상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9.15-16)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19.21)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2-24)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23.11)

 

         → 이태(2)가 지난 후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24.27a)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25.11)

 

2년이 넘도록 바울의 구금 상태나 그의 사명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다(24.27).

오히려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유대 총독들까지 모두가 다 바울 죽이기에 몰두한다. 그럼에도 바울은 2년 전이나, 2년 동안이나, 2년이 지난 지금이나 한결같다. 어떻게 이 세월을, 그것도 구금이 된 상태에서도 연약해지지 않고, 여전히 죽음으로 가는 길임에도, 그 고난의 길을 변함없이 바라보며 견디어 내고 있었을까. 흔들림 없이 주께서 명하신 사명을 붙들고서, 순종하면서 말이다.

 

이 모든 환난과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길에도 오직 순종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에서 오는 것일까. 아브라함에게서 그 답을 만나보자. 창세기 22장이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3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22.1-4)

 

바울은 복음을 위해 로마에서 죽겠다며 2년을 그럼에도 달려가는 중이고,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3일을 걸어가는 중이다. 무엇이 아브라함을 이처럼 순종으로 나아가게 했을까. 히브리서 11장이 답한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7-19)

 

그렇다. 바울과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살아가기는 무엇에서 나온 것인가. 믿음이다. 죽음이고, 환난이고, 고난이고, 아들을 제물로 드려야 하는 시험이고, 그러니까 어느 것 하나 영광이거나 감사거나 기쁨이거나 축복이 아닌 눈물과 실패처럼 보이는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도 믿음을 따라 하나님이 맡기신 그 길을 순종으로 달려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이 이 부분에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1]

무엇보다 바울의 모습이다. 오직 불변하는 진리를 따라 요지부동(搖之不動)한 삶을 사는 사람은 바울뿐이다: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그는 길이 막혀도, 죄수의 몸이 되어도, 사람들이라는 장애물을 만나도 상관하지 않는다. 화를 내지도, 비관하지도, 슬퍼하지도, 하나님께 따지지도 않는다.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을 그대로 따른다. 결코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을 앞세우면서 주어진 섭리의 흐름을 역류시키려 하지 않는다. 이처럼 사방이 막혀 있는 가운데도 오직 하나, 복음을 위해 로마로 가는 길을 향해 사명의 행진을 계속할 뿐이다.

 

[2]

이런 생활이 무려 2년이 넘었다(24.27a). 그것도 2년으로 끝이 아니다. 그러니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치고, 그래서 의심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은 가고 싶은데 길이 막혔으니까 슬그머니 로마로 가는 길을 유야무야(有耶無耶) 해도 될 것 같다. 이 길이라는 게 화려한 성공과 명성과 영광의 길이 아닌 죽음으로 가는, 죽으려고 가는 길이기 때문에 이쯤에서 멈추어도 될 것 같다. 따라서 그렇게 멈춘다고 해서 누가 시비를 걸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명의 삶을 한번도 거절하지 않는다. 막히면 막힌 대로, 멈추면 멈춘 대로, 누가 시비를 걸면 그것을 또 다시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는다.

 

[3]

하지만 오직 하나, 로마로 가는 복음의 길이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막히려 하자, 오직 그것만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지금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생명까지 내놓으며 순종으로 달려간다(23.11).

 

지금 바울처럼 붙들고 있는, 주님이 내게 주신 그런 사명과 소명이 있는가? 나는 과연, 그냥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의 2년이라는 세월을 바울처럼 비록 흔들리는 인생의 걸음일지라도 그럼에도 잠잠히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이 이끄시는 것에 나를 맡길 수 있을까. 그것도 주님이 나타나셔서 위로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어떤 사인(sign)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결국 그 끝이 죽음이어도 이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을까. 사명을 위해 죽음도 순종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누가와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별 변화 없는 2년동안, 그 하루하루 일상의 삶을 어떻게 살았을까. 신앙은 특별한 날에, 그러니까 어떤 사고와 사건과 어떤 긴급한 일을 만났을 때에 필요한 요술방망이가 아니다. 그런 일들을 위해 들어 놓은 무슨 보험이거나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다. 신앙은 그냥 오늘을 사는 거다. 바울이 2년이라는 세월을 이처럼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바울의 2년이라는 시간이 아브라함에게는 모리아산으로 올라가는 3일 길이다. 2년과 3일 길에 우리에게는 지난 주일 이후의 1주일이다. 특별하지 않아도, 별 변화가 없어도, 큰 기대가 있지 않아도, 그렇게 지나온 1주일이고 하루였어도 그 자리에 바울이고 아브라함이어야 한다. 이 순종과 믿음이 우리의 일상이고 영성이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자 믿음이고 맡김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그것은 죄수의 몸으로도 되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 바울의 2년에 들어있는 믿음과 순종의 걸음에서 배우는 영성이다.

 

 

  • 그 동안(2025.2 중순 - 12월 초) 사무엘상을 중심으로 <사울이야기>를, 그리고 그 사이에 <로마서 맥잡기> 시리즈 설교를 했습니다.
    연중에 구약과 신약을 오가면서 신구약 성경의 균형을 잡으려는 생각에서 이처럼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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