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1423주일 | 마27.27-44
십자가의 영성
A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21.9)
→ B “예수를 죽이자.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겠나이다.”(27.20,23)
“빌라도가 …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27.26)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27.35)
놀랍게도 예루살렘 백성들이 돌변한다(21.1-11/A → 27.20-26/B).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인간에 의해 갖은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온 몸으로 받으신다. 이것은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26.54,56)고 하시는 십자가의 길이다. 동시에 예수님 자신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6.39,42,44)라는 겟세마네 기도에 들어있는 주님의 기도의 성취이기도 하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십자가 영성과 다르게, 그럼에도 예루살렘은 십자가로 가는 길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이처럼 전혀 다른 두 그림이 27장에 등장한다.
십자가행전(32-44)
*총독의 군병들(35) -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지나가는 자들(39-40) - “예수를 모욕하여 …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서기관들․장로들(41-42) -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44) - “이와 같이 욕하더라.”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오늘 이후를 잘 모른다. 만일 오늘이 내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의 오늘은 어떨까? 아마도 그는 오늘이라는 시간의 그릇에 내일이라는 열매를 거두는 일에 투자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오늘도 모르고, 내일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구약과 선지자들의 약속도 모른다. 아니다. 이 모두를 하나도 믿지 않는다.
이 그림을 십자가로 가는 길의 좌우(左右)에 늘어선 무수한 사람들의 언행(言行)에 비추어 보자(*). 감히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던지는 ‘희롱’(29,31,41)과 ‘모욕’(39)이 오늘에 가득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자기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심판이 되리라는 걸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들의 오늘만 봐도 심판의 내일이 오리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죄의 무대를 나뒹군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숲 속에 호랑이가 없으면 토끼들이 뛴다.’는 말도 있다. 고난 받은 메시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聖子)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인간은 하나님마저도 자기 발 밑에 집어넣고서 기분 내키는 대로 짓밟듯이 날뛴다. 마치 토끼들이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고 정글이 자기 세상이 된 것인 양 겁 없이 날뛰는 형국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당신이 모독을 받으시는 그 순간에도 오래 참으셨다. 이 혼돈의 순간에도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屠獸場)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羊)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27장에 등장하는 이 사람들(*)과 다른가. 겟세마네 기도에서 이미 아버지의 뜻이 아닌 것들은 다 버리셨기 때문이다(26.39,42).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의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위해 그것이 아닌 것들을 끝내 포기하신 것이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26.53-54)
영적 원리가 여기에 있다. 먼저, 십자가로 가는 길에 이런 방해물들은 넘어야 한다. 이런 사소한 것에 발목 잡히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워주신 십자가를 무사히 감당하는 바른 길이다. 고난은 건너뛰거나, 없애 버리거나, 약화시키거나, 그래서 시늉만 하는 그런 눈속임으로 대면해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결코 이룰 수 없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29b)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40)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42-43)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그 옛날 갈보리 십자가 앞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하루를 산다는 하루살이는 내일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서, 그러니까 주어진 하루를 산다. 이렇듯 인생이 하나님을 모르면 하루살이처럼 진짜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단 하루를 세상살이 하다가 끝난다. 하지만 사람은 하루살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 그런가. 사람은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어서다. 육신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사는 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의 주인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모르면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끝이 오는 것일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다. 그것은 주께서 부활하사 40일이 지난 후(행1.3), 그리고 이어 10일 정도가 지난 이후인 오순절, 약속하신 성령이 오신 후(행2.1), 바로 이 복음서의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놀랍게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다. ‘호산나!’(마21.8-11) →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마27.22,23)로 돌변했던 자들이었다. 이처럼 돌변하여 멸망으로 돌진하더니, 그런데 불과 50일이 지났을 때다(행1.3). 놀랍게도 복음서와는 다르게 사도행전에서 이처럼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행2.1-4).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마침내 그러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라며 회개하고 돌이킨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저들을 이처럼 변화시키는가?
설교 곧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회개가 터진다. 감사한 것은 우리들도 역시 이처럼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희망은 말씀에서 온다. 이를 위해 십자가의 사랑과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다. 진정한 희망은 주님으로부터 온다. 이것이 27장이라는 소용돌이에서도, 비록 흔들리는 것은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십자가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다. 그래야 우리의 이야기에도 마태복음 27장을 지나 사도행전이 오고, 그리하여 사도행전이 우리에게도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