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30(양무리교회)
빌라도와 유다, 유죄(有罪)인 이유들
Matt. 27.1-26
본문 관찰
빌라도의 신문(1-2,11-26)
가룟 유다의 자살(3-10)
빌라도 ․ 유다 ․ 바라바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요18.31)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본디오 빌라도(AD 26-36)를 끌어들인다(1).
모두가 다 적(敵)과의 동침이다. 놀라운 것은 종교를 위해 정치를 이용한다. 이에 빌라도 역시 정치를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 모두가 다 예수님을 살리는 것을 위해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인가. 예수님을 죽이고 자신의 몫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위해 종교적인 신성모독죄로 포장하기까기했다. 그랬을지라도 마지막 하나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형집행권은 로마의 유다 총독에게 있어서다(요18.31). 따라서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 위해서는 불법을 합법으로 포장하면서까지 종교와 정치가 적절하게 손을 잡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제사장들의 죄와 총독 빌라도의 악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고 있다. 마침내 종교권력(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지금 세상 정치권력(총독 빌라도)을 등에 업고 메시아를 죽이려고 죄와 악을 도모한다. 이뿐 아니다. 백성들까지(‘그들’; 22b), 새벽부터(1a),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같이 발빠르게 죄악을 위해, 하나님과, 말씀의 약속과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주께서 십자가로 가는 그 길목에서다.
총독 빌라도(1-2,11-26)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18)
“빌라도가 이르되 어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23a)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사도신경 中)
명절이 되면 전례를 따라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하는 일이 있다(15). 이에 빌라도는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16) 하나를 생각해 낸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알”(18)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라도의 예상과는 다르게 군중들은 바라바를 요구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22b)라고 외친다. 그러자 빌라도는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23a)라며 주님을 변호하는 쪽으로 반전을 시도한다.
어떻든 빌라도는 심정적으로였을지라도 예수님에 대해 여러모로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참과 거짓 중에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는 흔들린다.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오직 자신을 살리는 쪽을 선택한다. 예수님마저도 자신을 위해서라면 버리는 카드일 뿐이다. 그는 점차 강도가 더해 가는 군중들의 반응을 보면서(24a), 오히려 폭동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불똥이 자기에게 옮겨올까 봐 슬그머니 발을 뺀다.
그는 정치적 실리를 위해 양심(종교적 원칙)과 사실을 팔아먹는 쪽을 택한다. 주님 편에 선 것 같지만 그러나 자기에게 불리하다 싶어지자 “나는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죄가 없소. 이것은 여러분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오.”(24b, 현대인의성경)라는 정치적 수사를 택하고 만다. 사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끝내 정치적 실리라는 결단을 선택하고 만다. 그러니 지난 2천년 동안 [사도신경]을 통해서 그의 부끄러운 이름이 오르 내리고 있는 것이다.
빌라도를 보면서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본능을 선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또한 종교적인 소리마저도 외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찰나적인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짧은 ‘이생’(以生)과 권력 때문에 영원한 ‘내생’(來生)을 포기하며 추락한다. 빌라도 시대 때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딜레마(허상)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죄는 무엇인가.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빌라도는 히브리서 11장 6절이 말씀하는 믿음이 없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다. 이 믿음이 없었다. 그랬으니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자, 빌라도에게는 이 믿음이 없었다. 그랬으니 비록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 주었다고 했을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러면 무엇인가? 자신의 명예와 정치와 야망을 위해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뜻을 이루어주는 일에 자신을 낭비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그러니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일에 나서지 못한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다 이렇다.
둘째, 빌라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특별히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 맡은 종과 같은 사람이다(마25.14-30). 주인이 종 세 사람들 모두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15a), 자기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14)겼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게 받은 종 가운데 한 달란트를 맡은 자도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달란트를 맡은 종에게도 주인의 소유를 이처럼 맡을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주인이 알고 맡긴다. 그런데 이 종은 주인과 다르게 움직인다. 유다 총독의 자리를 맡았다면 일반은총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를 통해 옳은 일을 통해 그 자리에 오른 재능을 나타내 보였어야 한다.
지금 빌라도가 그렇다. 그는 예수께서 왜 자신 앞에 끌려왔는가를 잘 알았다. 그러나 마치 한 달란트 맡은 종처럼 주인의 뜻과 다르게 움직인다.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예수를 버린 것이다. 진리와 생명과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목숨과 권력을 위해서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가룟 유다의 최후(3-10)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6.24)
유다를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고 아프다. 처음에는 나쁜 사람이다 싶다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서 측은하다 못해 불쌍하다는 생각이 많아진다. 유다 역시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써 지난 3-4년의 제자수업을 통해 형언할 수 없이 많은 영육(靈肉)의 양식을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으며 살았다. 하늘의 기적과 이적의 현장 가장 가까운 곳에 어김없이 유다 또한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설교로 따져도 가장 완전한 주님의 설교를 무수하게 들었고, 하늘의 기적을 보았으며, 그 자신 역시 오병이어(五餠二魚)를 통해 5,000명의 사람들에게 자기 손으로 나누는 자리에 있었고, 최후의 만찬에서도 주님 곁에 앉아 있었다. 이런 그가 변화되지 못하고 스승을 팔아버린다. 그리고 급기야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뉘우쳐(metamelomai) 자살(自殺)하는 것으로 자기 일생을 마감한다(행1.18-19).
인간이 변화되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일일까. 무엇이 유다를 이처럼 추락하게 만들었을까. 내가 유다가 아닌 이상 그 이유를 속단할 순 없다. 굳이 예수님에게서 이런 제자가 나왔음을 시비할 불충스러운 생각은 적절하지 않기에 이 주제는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인간은 자기 심은 대로 거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유다는 지난 세월 동안 천국의 것을 심지 않았던 것이다.
탈무드엔가 “참새가 내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내 머리 위에 둥지를 내리는 것은 막을 수 있다”와 같은 뭐 그런 말이 있다. 생각해 볼수록 뜻을 붙들만 한 귀한 교훈이다. 결국 유다는 악한 생각이 자기 마음에 박히는 것을 허용했고 사탄의 지배권 아래로 자신을 밀어 넣어버렸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한편 그는 주께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3-4a)라고 돌이킨다. 물론 죄의 자백과 그것의 용서를 주님이 아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한 것ㅜ이 좀 그렇지만 그는 최소한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그리고 예수님께는 죄가 없음을 고백한 것은 분명하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는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인생을 마무리한다(9-10, 슥11.13). 그러나 이 공로가 인정이 되어서 그의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을 통해서도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무서우리만큼 느껴진다. 하지만 말씀을 이루고도 이처럼 추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예사롭지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부스러기 묵상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21.8-11)
↔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22b,23b)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5)
군중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이용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또한 악질이다.
어떻게 무리를 권하는가(20): “‘바라바를 달라 …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급기야 저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더욱 소리를 지른다(22b,23b).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결국 하지 않아야 할 무서운 말을 토해낸 것에 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5) 예루살렘은 이처럼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다(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23.37-39)
하지만 예루살렘 백성들은 불과 얼마 전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온 성이 소동할 정도로 환영했다(21.8-11). 그런데 이처럼 돌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실이다. 주님은 이런 예루살렘의 운명을 내다 보셨고(24.1-2), 결국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만다.
계속해서 주님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렸고(26.56b),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면서까지 주를 부인하였고(26.74), 가룟 유다는 주님을 은 30에 팔아먹은 것 때문에 자살하였고(3-10),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한통속이 되어 주님을 죽이라고 외치고 있고(20,22-23,25), 빌라도 역시 이에 편승하여 진리의 길에서 슬쩍 빠져나가 버린다(24).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고 계신다.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따라 일하신다. 그래서 믿음이 중심이고, 씨앗이자, 열매다.
과연 나는 그때 어떤 사람으로 거기에 서 있었는가.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인가.
지금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나를 알고 내게 맡겨진 달란트를 통해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세워지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인가.
제2의 빌라도로 살아가는 헛되고 헛된 가짜 유사품 같은 믿음의 길을 멈추어야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내게 주신 재능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빌라도처럼 사용하고 있다면 곧 언젠가 저들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다. 빌라도처럼은 성공이 아니고 파선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믿고 맡겨주신 십자가의 길을 걸아가신 고난받는 그리스도가 보여주시는 진리다. 빌라도처럼 성경을 이루는 일에 참여해도, 유다처럼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는 일에 동참해도 다 소용 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어서다.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맡겨주셨음에도, 그렇게 맡은 달란트를 맡기신 자의 영광이 아닌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고난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빌라도와 유다를 통해 주시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