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성찬의 영성(마 26.17-30)

20250302(양무리교회)

 

 

 

성찬의 영성

Matt. 26.17-30

 

 

    본문 관찰

 

    ∎네 번째 수난예고(2) -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한 여자(7) -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2)

       제자들(8) -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가룟 유다(15) -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유월절 준비 & 식사(17-25)

       예수(21) -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제자들(22) 주여, 나는 아니지요

       유다(25)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첫 번 성찬식(26-30)

       ∙떡을 가지사 받아서 먹으라

          → 이것이 내 몸이니라

       ∙잔을 가지사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가룟 유다처럼 살겠다고?

 

때는 고난주간 목요일 저녁이다(2a).

주님은 특별한 유월절 식사를 위해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20). 놀랍게도 한 여인은 알고, 믿고, 그래서 2절 말씀에 12절로 응답하고 있으나, 제자들은 그러지 못하고 있고(8), 그 중 가룟 유다는 예수를 은 30에 대제사장들에게 팔아 넘기는 밀약을 맺는다(14-16).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만찬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가룟 유다도 동석해 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기로 밀약을 맺은 배신자다(14-16).

마지막 만찬이 진행 중에, 제자들이 하나씩 하나씩’(14.19) 각각 주여, 나는 아니지요?”(22)라며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응답한다. 이때 유다 역시 자신의 차례가 되자 동일하게 답한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25a) 그리고 떡과 잔이 오가며 성만찬이 이어진다. 이를 통해 네 번째 수난예고(2)의 신학적 의미가 드러난다. 바로 성만찬 신학이다(2 26-29). 마침내 주의 십자가 죽음의 이유와 목적이 한 여인을 넘어 제자들에게, 그리고 이 말씀을 받는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고 있다.

 

 

유월절 식사(17-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25a)

 

열한 제자들은 모두가 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며 각각 주님의 말씀에 응답했다. 이처럼 모두가 다 예수님을 ’(Lord)라고 불렀다. 그러나 유독 열둘 중에 가룟 유다는 달랐다. 그는 예수님을 랍비’(Rabbi, 선생)라고 부른다. 유다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말이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4)

유다는 주님께서 유다 자신의 비열한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다 아시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룟 유다 앞에서도 무수한 기적과 이적들이 이미 3-4년이나 거듭 반복되었고, 그는 이 기간에 한 번도 이 자리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다른 제자들이 각각 나는 아니지요?”(22)라고 근심으로 가득한 놀란 표정으로 주님을 응시하고 있을 때, 바로 그때 주께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23)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유다가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25a)라고 응답하였고, 이어서 주께서 네가 말하였도다!”(25b)라고 하셨을 때, 그렇다면 바로 이때가 가룟 유다에게는 성만찬 신학에 참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때였을 것이다.

그는 더 없는 애정과 연민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의 본래 자리로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외면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돌이키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주님으로 다가오셨지만 가룟 유다는 랍비로만 받아들이겠다는 죄의 그물 안으로 점점 걸려 들어감으로써 결국 멸망(파산)하고 만다. 성만찬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러나 성만찬 신앙과 신학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가룟 유다는 줄곧 예수님과 함께 하였으나 끝내 자기 길을 갔다: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1.25b) 사람이 마음과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랬으니 유다에게 예수님은 은 삼십보다 못한 그런 분이었다. 측은하게도 유다는 이 수준을 넘지 못했다(14-16).

 

 

첫 번 성찬식(26-30): 성찬신학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3,25a,26)

 

십자가를 지고 죽는다는 것을 말하고(공생애 중 4번째; 2b), 그것이 이루어지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도(이틀 후면 유월절; 2a), 제자들은 아직 십자가 대속에 대한 의미와 언약의 성취를 알지 못하고 있다. 영적 무지다. 또한 제자 중 한 사람이 주님을 팔 것이라 말해도 제자들은 여전히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과 그 말씀이 의미하는 십자가 죽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떤 말씀인가? 떡을 내 몸이니라”(26b), 그리고 잔은 죄사함을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28)라 하시는 말씀,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성찬신학>을 알지 못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지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시는 이 놀라운 구원의 길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며, 아무도 그 속에 든 비밀과 하나님의 뜻을 모른 상태로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죽으신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에 주님은 향유 한 옥합을 예수의 장례를 위하여 예수의 머리에 부은 한 여자처럼 제자들 역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게 되는 이유와 목적을 성만찬을 통해 알고 믿고 행하도록 하기 위해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무엇인가? 바로 26-28절이 말하는 성찬신학이다. 이처럼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왜 그런가. 요한복음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 요한복음 173절 말씀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성찬신학]

    ∙떡을 가지사 받아서 먹으라.”

       → 이것이 내 몸이니라.’(26)

    ∙잔을 가지사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7-28)

 

요한복음 6장은 성찬이 주는 메시지를 잘 알려준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는 기적(1-15), 이어서 이후에 행하신 메시지에 성만찬의 신학과 신앙이 들어있다. 그 가운데서 26절부터 읽어보자.

무엇이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성만찬 신앙을 방해하고 가로막는가? 다른 말로 하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여인처럼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1] 성만찬 신앙을 알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함이다. 그 증거가 가룟 유다다.

[2] 예수와 믿음의 삶을 단지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사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3] 그리스도로 살고, 그리스도로 죽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함이다.

 

우리 역시 성만찬의 신학과 신앙을 가지지 못하면 이처럼 세상 사람들처럼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가룟 유다처럼 사는 것이다.

 

이어지는 결론이다. 요한복음 653-58 말씀이다: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듯이 당신의 몸을 이처럼 온 인류를 위해 주실 것을, 잔을 주시듯이 당신의 피를 인류 구원을 위해 아낌없이 다 주실 것을 오병이어의 기적에 담아 말씀해 주신다. 이것이 십자가 신학이다.

성찬에 대한 말씀은 이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가 가깝게는 제자들 자신을 위해서, 멀리는 온 인류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말씀을 듣는 오늘 우리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드러났다. 이를 위해 주님이 오셨고, 십자가에서 이를 이루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이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주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을 주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전하는 책임을 주께로부터 받았음을 고백하곤 하였다(고전11.26).

 

 

부스러기 묵상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 양처럼 세상 죄를 대속하실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

그렇기에 주님은 이 유월절을 앞두고, 그저 밥이나 한끼 서로 같이 먹자는 것으로 특별한 저녁을 사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첫 번 성찬식에서 언젠가 다시 저 천국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29b)을 바라보심으로써 유월절 식탁의 의미를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확장시키신다. 그리고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24a)처럼 철저하게 구약의 메시아 언약을 성취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주께서 가시는 길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28)를 흘리는 곳, 바로 갈보리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이다. 따라서 아무리 이 길이 험하고, 또 무수한 반대와 저항이 있다(3-5,14-16)고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으실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주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때문에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24b)던 자로 살다가 갈 수는 없다.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 대속의 은혜를 알고 믿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내 유다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랬으니 예수를 팔아 은 삼십을 얻겠다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이처럼 살아가는 기독교 장사꾼들이 가룟 유다 한 사람뿐이겠는가. 오늘 우리 시대에도 기독교(예수, 교회)를 상품화(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만찬 신학과 신앙에 그 답이 있다. 이것이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는 삶이다. 십자가로 사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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