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1399주일 | 사7.10-17
임마누엘의 영성(2): 인생의 후반전에서
구약 이사야 7장 14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성취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로서 임마누엘하신다. 이 구약 이사야의 예언은 신약에서 약 700년 후에 성취된다.
주의 징조(사7.14): 임마누엘 예언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임마누엘 성취1
▪마태복음 1.18-23 – 그가 오셨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23)
구속(십자가): 복음서 – 교회 - 요한계시록: 임마누엘 성취2
그가 오셔서 한 일이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 “다 이루었다!”(요19.30)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바로 그날까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 그러니까 임마누엘하리라 하셨고(구약), 그 약속의 성취로 그리스도가 임마누엘로 오셨고(신약), 그가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마1.21b)을 ‘다 이루었다!’ 하셨고, 동시에 그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 하셨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시다. 오늘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삶의 여정을 마태복음 7장에서 살펴보자.
이미 임마누엘과 아직 임마누엘, 그 사이
마태복음 7.24-27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자, 임마누엘이라는 다리를 건너 마태복음 7장 24-27절로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임마누엘 안에 있는 25절이고 27절이다. 무슨 말인가: ‘임마누엘인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그럼에도 비와 창수와 바람이 있다.’ 놀랍게도 우리의 실전 역시 임마누엘의 날개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와 바람과 창수가 뒤따르며 우리를 가지고 흔들어댄다. 이 부분이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설교가 자리하는 곳이다.
그러고 보면, 이사야가 임마누엘의 징조를 외칠 때에도 혼돈의 비는 있었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고된 그대로 임마누엘이 응하였을 때에도 피난과 광란의 유아살해라는 창수도 있었고, 공생애를 통해 그리스도가 다 이루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유대교라는 바람도 있었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고 계심에도 그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의 여정 또한, 특별히 산상수훈의 결론처럼 반복되면서 여전히 돌림노래 중이다.
그렇다면 임마누엘 안에 여전히 우리를 흔들고 있는 산상수훈을 타고 불어오는 비와 창수와 바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이겨내고, 넘어서야 할까. 산상수훈의 결론은 우리를 어떤 임마누엘의 영성 앞으로 초대해 줄까.
[1]
보통 우리는 임마누엘의 은혜 안에 있으면 24절이 주어지고 펼쳐진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이를 위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으니 24절은 당연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반석 위에 세운 집 같으니까 형통이고, 축복이고, 응답이고, 감사만이 넘치는 그야말로 임마누엘의 열매 가득일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정리하면 임마누엘 안에 24절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연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24절의 임마누엘 안에도 25절이 있다는 점이다. 놀랍다. 마태복음 5-7장에 걸쳐 선포된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로 살아도, 그가 살아가는 임마누엘 안에 25절이 언제든 뚫고 들어온다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로 살아갈지라도 24절만이 아니라 25절도 통과해 간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임마누엘은 24절만으로 성취되거나, 드러나거나, 채워지지 않는다. 이 보석이 만들어지기까지 25절이라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기독교는 24절만을 약속하지 않는다.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임마누엘의 여정에는 25절도 있음을 말씀한다. 24절과 25절이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임마누엘이 품고 있는 절묘함이자 영성의 실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24절처럼 살고 있음에도, 어느 순간 우리네 삶의 여백이 25절로 채워질 수 있다. 임마누엘이어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24절이라는 날들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라가고, 믿고, 바라보고, 섬기는 것이 임마누엘의 영성이다.
[2]
자, 그럼에도 26절처럼 살아간다? 놀랍게도 임마누엘을 살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그것을 깨뜨리고 무너지게 하는, 그러니까 임마누엘을 행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들이 있다. 다시 말하면, 임마누엘 안에 있으면서도 26절처럼 살 수 있다. 그 결과, 그러니 27절이다.
임마누엘 안에 있어도 삶의 노래는 극과 극이다. 그런데 26-27절처럼 사는 자들이 있고, 24-25절처럼 사는 자들이 있다. 모두가 다 임마누엘의 품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