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1392주일 | 행21.1-16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밀레도(20.15) → 고스/로도/바다라(1) → 두로(3) → 돌레마이(7)
→ 가아사랴(8) → 예루살렘(15)
두로의 제자들(4) - 성령의 감동으로 …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가아사랴의 아가보(11) - 성령이 말씀하시되 …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가이사랴 & 우리(12)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 바울(13) -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우리(14) -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예루살렘 가는 길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3-24)
환난이니 하지 말라. 그러나 죽어도 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이다(20.16). 그리고 그 길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증거를 통해 이미 이를 알고 있었다(20.22-23). 그래서 다시 보지 못하게 될 에베소교회 지도자들을 청하여 말씀을 나누었던 것이다(20.17-38). 하지만 문제는 결박과 환난이 있음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바울을 향해, 다름 아닌 바울 곁의 사람들의 거부 반응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① 기도와 눈물과 근심에 따른 아쉬운 작별이다(20.36-38 → 21.1a).
② 두로의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한다(3-4).
③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언행을 통해 ‘성령이 말씀하시’는 결박을 예고한다(10-11).
④ 가이사랴 성도들이 아가보의 말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한다(12).
⑤ 바울의 동역자들까지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가로막는다(20.4 → 21.1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과 환난을 만난다는데 그걸 웃으면서 잘 되었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지금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첫째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강도와 그 대세가 점차 고조되더니 마침내 바울의 동역자들까지 여기에 가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쉬운 말로 하면 교회 전체의 입장과 바울 한 사람의 생각이 서로 맞서고 있는 셈이다. 결국 대세는 바울이 포기하라는 분위기다. 이럴 경우에 오늘 같았으면 아마 바울은 교회를 떠나야 했을 것이다.
둘째로, 양측이 이처럼 언행하게 되는 배경에 있다. 바울도 ‘성령의 매임’(인도)과 ‘성령의 증거’를 따라 예루살렘에 가고 있다(20:22-23). 그리고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 역시 성령의 감동과 말하게 하심을 따르고 있다(4,11,12). 모두가 다 성령님과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더 곤혹스럽고 어렵다. 성령님이 그러셨다는데 다른 뭐가 더 필요하랴.
그러나 예루살렘 논쟁은 이런 이전투구(泥田鬪狗)로 가지 않았다. 그래서 복되고, 꼭 배워야 할 부분이다. 무었을 배워야 하는가. 서로 다르지만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며 아우성치지 않았다. 특별히 숫자노름이라는 다수의 횡포를 통해 바울의 결정과 사명의 길을 막지 않는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의 심경과 사명을 더 분명히 붙들고 있을 뿐이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14)
[보통, 갈등하고 싸울 때]
*금식하고, 기도는 얼마나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헌신했어?
*교회를 위해 한 게 뭐야?
*주일성수도 그렇고, 헌금생활도 변변치 않은 주제에?
*당신 나이가 몇 살이야?
→ 이를 다 뒤집어보면 나는 너보다는 뭘 해도 했다는 것이다.
결국 뭐죠? 내가 한 게 너를 뭉개고 꺾는 도구요 수단이 될 뿐이다.
이 경우에 주님의 뜻하심이나 주께서 하실 일들은 다 사라지는 셈이다.
그리고 오직 너보다 조금이나마 공로가 있는 나 자신만 남는다.
[사랑이 답이다] 입술의 공격은 축복의 문을 가로막는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4-7)
사도행전이 건강한 것은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14)라고 말하고서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불평이 없고, 자기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궁시렁거리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바울의 결정을 따른다(15-16). 바울 또한 ‘감히 누가 자기의 뜻을 거스리느냐?’며 함구령을 내리고서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다. 그렇지만 성령님의 인도와 증거를 따라 언행하는 바울의 결정을 존중한다. 최종 결정이 있기 전까지는 왈가왈부(曰可曰否)가 있었지만 일단 결정이 난 이후에는 모두가 다 함께 하나님의 뜻 앞에 선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바울은 어떤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그리고 온유함을 따라 하나님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심(私心) 없는 바울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쓰셨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어차피 한 번 왔다가 가는 세상이고 나그네 인생길이 아닌가. 바울이 예루살렘 가는 길 앞에서도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게 언행하지 않고 평소대로 물 흐르듯이 살았다. 사도행전은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길을 이제 우리가 그렇게 걸어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