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예루살렘 보고회(행 11.1-18)

20231109(묵상)

  

 

 

예루살렘 보고회

Acts. 11.1-18

  

 

    본문 관찰

 

      1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9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17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문제 안에 있는 해답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밖에 머물던 세월들이 있었다(9.32-10.48).

이 기간 동안에도 그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환상이 성취되는 섭리를 맛보며 살았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 11장이다(2). 그렇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복음을 위한 수고에 대한 찬사와 격려와 위로가 아니었다.

 

 

할례자들의 힐난 설 명

 

    “네가 무할례자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3)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9)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1, 9.32,36, 10.23b- )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십자가 복음과 성령 시대에도 할례자들의 소리가 만들어질 정도로 아직도 구약의 율법이 신약의 복음과 긴장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할례란 행위 구원의 표(sign)로서 믿음과 대치되는 것의 대명사라는 점에서 여전히 옛 법(옛 사람, 율법)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그룹이 교회 안에 어느 정도의 세력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하나의 창()이기도 하는 때다. 이렇듯 베드로의 이방 사역(9.32-10.48)은 할례자들로부터 힐난의 빌미가 되었다.

종종 이와 같은 해프닝 같은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할 때가 많다. 이때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무엇일까, 먼저 성경이 말하는 얘기를 들어 보자가 아니다. 자기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해 버린다. ‘다르다틀리다를 구별하지 못하며, 또한 그 판단의 기준이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언행이면 할례자들의 모습처럼 그 문제를 접근한다. 이것만큼 위험하고 난감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이점에 있어서 베드로의 반응이 참 귀해 보인다. 그는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수고와 헌신, 그리고 이에 따른 결과를 무기로 섭섭해 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이것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되었고 또한 되고 있느냐보다는 성령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주도하시고 이루셨는가를 설명’(4- )한다. 그는 자신이 환상을 보니(5) 또 들으니(7) 성령이(12) 그런즉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이방선교 설명회]를 이 기회에 갖는다.

 

 

설 명 하나님께 영광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b)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18b)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비난’(2)이 변하여 하나님께 영광’(18)이 되도록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바로 그 사이에 설명’(5-17), 곧 그의 설교(간증)가 자리한다. 이것은 단순히 말만이 아니다. 사람들을 대하고, 문제를 바라보는 영적인 통찰이 있다. 사람들의 시비와 비아냥거림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꿀 수 있는 탁월한 지도력이 있다.

자세하게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이 흐르게 하시는 방향대로 순리를 따라 마치 흐르는 물처럼 살아간다. 결코 자기 중심적이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거나, 자신의 공로를 앞세워 할례자들(비난하는 자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는 비록 사도행전의 전반부가 베드로 행전으로 기록되게 되는 증인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의 중심에는 성령행전 속에 들어있는 자신임을 잃지 않는다. 한 번도 위대한 쓰임을 무기로 교만하거나, 자고(自高)하거나, 자신을 포장하는 일에 섞이지 않는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부스러기 묵상

 

어디에나 나와 다르게 언행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지금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틀렸다고 몰아 붙인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들처럼 언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바른 것과 옳은 것이라는 자기 정당성을 위해 변론하고 있지 않다. 자신은 십자가 뒤로 감추고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님 안에서 어떻게 사도행전을 주도하고 계시는가를 주목하고 그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것으로 설득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설명’(증거)하고 있음을 읽게 된다. 더불어 이것은 비난으로 야기된 문제의 결론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끝을 알았고 하나님이 이루실 일의 시작을 믿었다. 결코 하나님과 자신을 혼돈하거나 바꾸지 않았다.

베드로처럼 문제 안에 있는 해답을 보며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역류하지 않고 그 흐름을 타면서 그 일을 이루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사는 삶, 베드로에게서 배우신 신앙 방정식이다. 그는 해답 역시 성령행전으로 채우기를 기뻐한다. 비록 자신이 쓰임을 받고 있지만 조연의 자리로 스스로 내려 앉는다. 그는 탁월한 설명가(說明家). 나눔의 원리와 그것이 주는 축복을 누리며 사는 지도자다. 그러면서도 겸손할 줄 알고, 성령님을 높이며,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의 흐름을 적절하고 평안하게 읽어낼 줄 아는 영적으로 탁월한 사역자다.

사람은 뭔가를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초지일관(初志一貫) 지키며 살 수 있는 건강함이 부럽다. 자칫 처음은 경건하고 겸손한데 조금 하나님이 쓰시면 자기로부터 어떤 능력과 힘이 나오는 줄 알다가 그렇게 무너지고 추락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많은 종들 가운데 왜 베드로를 사용하시고, 그를 통해 베드로 행전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가를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본다. 1장에서의 모습과 11장이 보여주는 모습에 전혀 차이나지 않는 베드로의 영성을 주목한다. 3천명이 회개하고 믿게 되어도, 앉은뱅이가 일어나도, 죽은 자가 살아나도 그는 초발심(初發心)을 잃지 않았다. 사도행전이 말씀하고자 하는 성도의 모습이다.

 

 

  • 1차적으로 본문(11.1-18) 역시 묵상으로 설교를 대신한다. 후에 기회가 되면 양무리교회 강단에서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본문을 만날 수도 있다.
    강해를 건너뛰는 것은 특별한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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