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1984년은 내게 참 어두운 방황의 길목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 볼 것 같은 신앙 안에 있다가 세상이라는 또 하나의 현장에 나아가마자 휘청하고 무너졌다. 그때 내 신앙은 이처럼 무능하고 유약했다. 그리고 그걸 힘 없이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던 한심한 '방황덩어리'였다. 무엇보다 신학의 담은 생각 이상으로 높았다. 전국 교회 고등부에서 날리는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그래서였을까 다들 자신감과 능력이라고 할까 뭐 이런저런 모습에서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걸음 앞에 있었다. 시골 촌놈이 따라가기에는 여러모로 버겁고 숨찼던 시절... 그래서 신학생병을 핑게로 학교 밖으로 나왔으나 그렇다고 딱히 어떤 수가 있는 것도 아닌... 이런 방황의 틈바구니에서 난 글을 썼던 것 같다. 이 시절 만난 분이 남서울교회 부목사셨던 박영선 목사님이다. 설교와 성경을 보는 눈을 조금씩 떠간 시절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설교 TAPE는 늘어나 들을 수 없어 다시 어찌어찌 손에 넣어 그걸 외우다시피 듣고 들었던 때다. <하나님의 열심>이나 <구원, 그 즉각성과 점진성> 같은 책을 책이 분철될만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 물론 모친은 누워 계시고, 하지만 차도는 없고, 그래 긴 겨울 어찌해야 하나 싶었던 눈물의 시절이었다. 이럴 때 절박하니까 나라도 기도의 무릎을 깊게 꿇었어야 할텐데 그런 재주도 믿음도 없었으니, 내가 봐도 난 참 한심하기 그지 없는 신학생이었다. 그렇게 1984년 한 해가 가고 있는 12월이었던 것 같다. 난 절망했고, 휘청거렸으며, 그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지하고 무가치한 존재였다. 신앙이 좋고 깊어 하나님 편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버티어야 하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 사이에 낀 그렇고 그런 모습으로 한 해를 통과해 가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마른 막대기보다 못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