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사울 그 이후(2): 사울 죽이기(행 9.23-31)

20231015(양무리교회)

  

 

 

사울 그 이후(2): 사울 죽이기

Acts. 9.23-31

  

 

    본문 관찰

   

    다메섹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예루살렘

    사울이 예루살렘에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변론하니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사울 죽이기 vs 사울 살리기

 

 그리스도 밖에서 친구였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친구가 되지 못한다.

주 예수 밖에 있는 자들과는 주와 복음과 교회를 위해 같은 길을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울에게는 다메섹이 그 변곡점이다.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순간, 이전에 사울의 친구들은 이들은 복음과 십자가의 적대자들이다.- 사울 죽이기로 돌아선다이게 세상이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의 선택이다.

 

사울이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그때 그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붙잡힌 사울에게 그리스도 밖의 세력이 사울을 핍박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저들은 사울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울 죽이기’(23,29)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사울 죽이기

다메섹: 핍박의 문이 열리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0)

       → 놀람: ‘이 사람이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21)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22)

       →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23)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29a)

       → 그 사람들(헬라파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29b)

 

  이처럼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사울을 찾아오신 것이다. 이는 사울에게 임한 은총이라 이름하는 구원사건이다. 하나님은 먼저 그의 심령을 변화시키셨다. 그러자 그는 이전의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섰다. 하나님이 먼저 그를 부르시고 십자가 복음으로 만나주심으로서 이어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간다.

 

그 결과 인생의 방향과 목적이 달라졌다. 사울은 핍박자로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정작 다메섹에 들어갔을 때는 전도자로서다. 핍박의 대상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였으나 이제는 그를 전파하는 증인으로 다메섹 백성들 앞에 서 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갔던 다메섹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이제는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한다(23-24,29).

 

그리스도 밖의 세상은 사울을 토사구팽(免死狗烹(“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한다. 이제 사울은 더 이상 그들에게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세상은 자신의 목적 때문에 사울을 사용했지만, 그 목적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제는 그를 죽이려고 한다. 세상과 사탄은 언제나 그렇다. 그는 처음부터 거짓의 아비요(8.44), 할 수 만 있으면 믿는 자들도 미혹하려는 타락한 자이고, 복음과 진리의 원수이다(24.24).

 

 

사울 살리기

예루살렘: 동역의 길이 열리다.

 

    ∙사울의 제자들(25)

    ∙바나바(27-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제자들)

    ∙예루살렘의 형제들(30)

 

자신을 죽이려 하는 세력 앞에서 사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런데 그런 사울 곁에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인가. 사울을 살리려는 사람들이다,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22)과 헬라파 유대인들(29)은 사울 죽이기를 공모한다(23). 이처럼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할 때에 사도행전 9장의 분위기는 사울 살리기 쪽으로 이동한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 먼저 사울의 제자들’(25)의 도움을 받게 된다. 유대인들은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지만 사울의 제자들은 사울 살리기를 도모한다(23 25). 회심 이후 이미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이미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바울공동체) 그룹과 함께 할 정도로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었다(1.11-24).

 

[2] 하지만 아직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사도)들은 사울을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26b)던 그런 분위기였을 때다.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 이번에는 바나바가 사울을 돕는 자로 나선다(27). 하나님은 바울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신실한 종들을 그에게 붙여주신다. 앞에서 바나바(‘위로의 아들’)는 자신의 밭을 팔아 교회에 드리고서 전적으로 복음을 위해 헌신해 오고 있는 사람이다(5.36-37). 그는 평신도였으나 사도들에게 언행심사(言行心事) 모두를 인정받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사울 변호가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볼 때 그렇다(27).

 

[3] 이렇게 해서 사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제자들)과 함께 하며 교제권을 형성하면서 가까운 훗날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는 일에 기초를 놓게 된다(28, 13.1-3). 이처럼 한 사람 바나바의 아름다운 동역을 통해서 사울 죽이기의 위기를 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26)는 영적 기류까지 변화되어지고 만다. 이게 다 바나바(27)의 사울 살리기가 낳은 열매인 것이다.

 

[4] 마지막으로 형제들이다(30; 1.16 참조). 이들은 다메섹 예루살렘(19 26)에 이르기까지 사울 죽이기의 음모에 노출되어 있는 사울을 다시 예루살렘 가아사라 다소(300로 보냄으로써 사울 살리기에 힘을 보태는 사울의 동료들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일반 성도들이다.

 

이처럼 사울은 함께 주와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들과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는 선교를 수행하는 바나바에게,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그리고 예루살렘의 일반 성도들로부터, 그러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사울을 살려야 한다는 섬김을 받고 있다. 그야말로 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이자 인정인 셈이다.

 

 

부스러기 묵상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9.23)

 

사울 그 이후, 그러니까 다메섹 이후의 사울은 오히려 고난으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의 삶은 늘 그러하다. 사울 역시 이 고난의 길을 걸어간다. 인간적으로 볼 때 사울만큼 비참하게(?) 쓰임 받은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이것이 제자의 소명이다(9.23).

 

그는 기꺼이 자신을 교회와 복음을 위해 살아있는 산 제사’(12.1)로 드린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기쁨으로 생명을 바친다(7.59-60). 죽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임을 믿고, 그렇기에 그 어떠한 형편에서든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며(4.11-12),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며 살았다(4.13).

 

이렇듯 다메섹 이후, 그러니까 사울 그 이후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변화된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이후, 즉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그 이후의 이력서가 사울처럼 있어야만 한다. 세상은 사울 죽이기였으나, 주님은 복음의 사람들을 통해 나를 살리신 은혜 말이다.우리는 사울처럼이든가, 사울 곁의 사람들처럼이든가, 결국 이 모습으로 복음을 위해 자신을 드려야 한다. 반대로 그 누구도 사울 죽이기 편에 서는 것은 안 된다.

 

이처럼 사울이 바울 되어 쓰이기까지 그의 제자들’(25), 바나바(27), 사도들(28), 형제들(30)이 적절하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동역이다. 복 있는 주연 곁에는 이처럼 언제나 빛나는 동역자들이 있는 법이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다. 바울만 그러는가. 아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그러하다.

 

오늘 함께 예배하는 성도들과 교회가 복되고 아름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예배자들에게 잠시 얼굴을 돌려보면 바로 옆에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이 있고, 바나바 집사와 같은 성도들이 있고, 함께 오늘 여기까지 교회를 섬겨온 복음의 형제 자매들이 보인다. 바울 살리기, 그러니까 교회 살리기, 성도 살리기의 아름다운 동역자들이다. 이와 같이 동역자들과 더불어 사도행전을 성취해가는 것을 보면서 건강한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선물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오늘 바울과 동역자들이 보여주는 성도의 모습이다. 주께서 사도행전을 통해 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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