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에
언제부턴가 비가 좋다
주룩주룩 나리는 줄기 사이로 어른거리는
모양도 그렇지만,
우산을 받쳐 들고 한발씩 걷는 소리도 좋다
어릴 땐 눈이더니
이젠 그렇게도 싫던 비가 좋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표겠지, 아마!
비를 보면
여유가 있다
흙이 툭툭 튀는 황톳길을 따라
걷고 싶기도 하고
비 내리는 그 길 따라
짧은 산책이라도 했음 좋겠다
비를 보면
왠지 포근하다
흠뻑 젖은 머리통과 얼굴을 긴 치맛자락으로
닦아 주시던
어머니가 있는
고향의 빗길을 한 걸음 걷고 싶다
날 토옥토옥 쳐주는 소리와 함께
한 번 흠뻑 젖고 싶다
1989.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