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3(양무리교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 Sam. 1.1-18
본문 관찰
사사시대의 민낮: 아들이 있으나 사사시대와 아무 상관이 없다(1-8).
사사시대의 비전: 한나는 사사시대에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다(9-18).
한나의 기도(1)
사무엘상은 사사시대를 배경 삼아 시작된다.
이것은 엘리가 죽을 때의 부고장에서 알 수 있다: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40년이었더라.”(4.18b) 그런데 정작 살아있는, 그것도 사사인 엘리와 제사장인 그의 두 아들은 엑스트라처럼이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한나의 ‘아들’(11)이 주연으로 자리하는 분위기다. 사사시대임에도 살아있는 사사 엘리와 그의 사사시대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으며 그저 살아있다는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한편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레위인이며 제사장 가문에 속한 고핫 자손의 후손이다(1). 하지만 사무엘상 1장이 전하는 바를 살펴보면 그는 제사장으로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사시대가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영적 암흑기로 치닫고 있음에도 그는 레위인이자 제사장으로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움직임이 없어 보인다.
사무엘상, 사사시대가 그 배경이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3b)
분명한 것은 사사가 살아 있고, 그러니까 사사가 다스리던 때인데 전혀 사사시대스럽지가 않다. 뭔가 묘하다. 사사 엘리도, 그의 아들 제사장들(3b)도 사무엘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분명 사사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사무엘상 이야기의 중심은 사사인 엘리가 아니다. 그것도 어떤 이유인지 레위지파 제사장 가문이지만 제사장으로 일하지 않는, 오히려 한 여인인 한나가 사사시대의 역사를 써가는 분위기다. 그러면서 사무엘상 주제의 흐름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단지 태중에 있는, 하지만 아직 아버지 엘가나와 어머니 한나의 품에 있는 어린(24b) 사무엘에게로 사무엘상의 중심이 이동한다. 사사시대인데, 사사이자 제사장인 엘리가 있는데도 말이다(1.9, 4.18b). 하나님은 사무엘을 이처럼 등장시키신다.
분명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3b) 실로에,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하며 제사를 집례하던 때였다. ‘여호와의 전’이 있고, 제사 곧 예배가 있고, 제사장이 있고, 모세의 율법이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가 다스리는 때다. 그런데 사사시대가 영 무엇인가 부자연스럽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2장에서는 사사시대의 영적 형편이 소개된다(2.11-36). 문제는, 그런데 사무엘상은 지금 다스리던 사사가 죽어서 부재 중이거나, 그러자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범죄한 때가 아니다. 엘리가 시퍼렇게 살아서 사사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는 때다(4.18b).
바로 이러한 때에 한나(한집사)가 사무엘상의 무대에, 사사시대의 역사에 등장한다. 에브라임 지파의 엘가나라 하는 사람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으로(3a-4,21), 한나는 기도의 사람(10- )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이 한나는 어떤 사람인가이다.
한나의 영성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11b)
한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 보자:
[1] 그녀가 지금 아들을 구하는 것은 단지 브닌나(브집사)의 질투(투기, 시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고 봐야 할까? 혹은 대(代)를 잇는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엘가나의 가정에서 버림을 당할까 봐서 어떻게든 아들을 얻고자 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런 육신적인 욕심을 따라 구하여 낳은 아들이 사무엘이라는 말인데, 그의 출생은 이처럼 부모의 파워게임(아들낳기 경쟁심)이라는 부산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이것이 1장을 지나 2장에 서 있는 한나라는 어머니란 말인가?
[2] 이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만일 한나는 이미 무너진 레위인이자 제사장인 엘가나의 가문, 특별히 그 아들들(그러니까 브닌나의 아들들)에게서도 역시 결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영적인 텅빔을 보았다면... 아들이 있으나 사사시대를 다시 건강하게 할 그 어떤 비전과 갈망도 없는, 그리하여 사사가 있으나 전혀 무능력한 시대를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할 ‘아들을 주시면’(11b)이라면... 어떤가.
[3] 만일 이처럼 한나가 사사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으로 기도를 시작한 것이라면, 어떤가? 그럼 1장의 기도(10-11)의 부르짖음과 통곡은 어떤 의미일까? 그렇다면 브닌나처럼 ‘나도 있을 것은 있어야겠다’라는 식으로, 그러니 떡두꺼비같은 아들 하나만 달라는 것이 한나가 드린 기도의 전부였을까?
[4] 1장의 기도(10-11)는 단지 무자(無子)함을 면하기 위한 무엇인가 없는 자의 개인적인 서러움이고, 그러면 자기 자신만의 행복과 복을 원하는 그런 기도의 사람이란 말인가? 그러면 영성의 사람이 아니라는 얘긴데... 역시 그러면 사무엘을 설명할 길이 없는데... 그러면 한나의 기도와 사무엘 출생 기사는 삼류소설과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만다.
지금 사사시대는, 그야말로 모두가 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제사장의 가문인 엘가나의 가정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사사 엘리와 그의 아들인 제사장들마저도 말이다(2.11- ). 그러나 오직 한 사람, 한나, 한집사 그녀만은 무너져가는 이스라엘, 이처럼 사사시대라는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반복하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점점 타락과 심판의 길목으로 빠져가는 이스라엘, 예배가 있고, 제사가 있고, 성전이 있고, 율법이 있어도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거나 드러내는 일에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총체적인 위기, 그 속에서 오직 한 사람 한나만이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통곡한다.
이 타락한 사사시대를 다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세워놓기 위해 기도의 무릎을 꿇고 주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만군의 여호와여, 저의 괴로움을 돌아봐 주십시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를 잊지 마십시오. 저에게 아들을 주신다면, 그 아들과 그의 전 생애를 여호와께 드리…겠습니다.”(11, 쉬운성경)
‘여호와여 만일 …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11)
부스러기 묵상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20b)
엘리의 땅에도 한나의 하늘이 열린다.
한나는 단지 브닌나의 코를 납작하게 할 그런 아들을 하나 더 이 땅에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기도를 동원하고 있지 않다. 그녀는 찬란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이것이 그녀의 기도의 핵심이고 그녀의 영성이다. 한나의 가슴에는 이 불이 있었다. 단지 너는 있는데 나는 없다, 그러니 나도 있어야겠다, 그래서 기도한다, 그러니 내게도 달라는 식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브닌나의 훼방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6b)였고, 그래서 괴로움(10), 슬픔(15), 원통함(16)이 한나를 엄습해 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나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도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찾고, 다시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고, 기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낸다. 놀라운 것은 기도가 응답되자 브닌나는 사무엘상에서 사라진다. 그녀의 아들도 마찬가지다.
한나가 당한 인간적인 고통과 아픔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한나는 이런 것들에 전혀 연연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몰고 갈 생각은 전혀 없다. 그녀도 역시 사람이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쓸쓸하고, 한스러웠을까? 우리가 당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흐름으로, 하나님의 회복으로, -단지 개인적인 아픔으로 끝내 버리고 그것을 잊고 무마하고 넘어가기 위해서 기도를 빌려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이 사사시대를 절망하게 하는 것들을 다 쓸어버리는 거룩한 파도를 타오르게 하는 부흥을 열어가고 있다.
양무리교회와 을지트를 항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11b) 우리시대의 아픔을 보면서, 을지트의 헐떡거림과, 영적인 공황과 침체와 연약함과 무너짐을 보면서, 그럼에도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러나 거기에 휩쓸려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이 영적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워내는 사람이 필요하다.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11b)
“주여, 을지트를 주시면 양무리가 을지트를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한 주간 저는 매일 중보기도회를 드리면서 이 말씀을 이렇게 품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10년 전부터 하나님은 이 일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이번 단기선교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새 일을 기대하고 기도한다. 이번 여름을 지나면서 교회 리더십과 의논하여 해가 가기 전에 <을지트선교회>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곳 양무리로 부르신 곳에서, 땅끝 을지트로 보내신 곳으로!
땅끝 양무리로 부르신 곳에서, 저곳 을지트로 보내신 곳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인도하셨다. 이제 이어질 을지트를 향한 우리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며 기대하며 기도한다.
양무리를 통해 을지트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복음이 흘러가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을지트를 통해 몽골과 열방에 동일한 일을 행하실 것을 믿는다. 이를 위해서도 우리에게 해야 할 소명과 사명이 있음을 믿는다: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