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8(묵상)
이스라엘 사이클(cycle)
Isa. 59.1-21
본문 관찰
이사야(1-8) - ‘너희’
이스라엘(9-15a) - ‘우리’
하나님(15b-21) - ‘이르시되’
돌림노래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2a)
‘너희’ 메시지가 ‘우리’의 고백으로 이어진다(1-8 → 9-15a).
선지자의 고뇌에 찬 이스라엘 되돌리기(너희 →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낳고 있다. 이사야의 설교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가 아니었고, 이스라엘은 마치 베드로의 청중들처럼 하나님의 종이 외친 설교에 반응하기 시작한다(행2.37 참조). 오랜만에 선지자의 사역이 열매를 맺고 있음을 본다. 하지만 이사야와 이스라엘의 만남은 땅의 잔치로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이어지면서 사람들만의 축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한편 하나님의 개입(일하심)이 우리의 고백 뒤에 이어지고 있음이 뭔가를 좀 더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이사야(1-8) - ‘너희’
이스라엘(9-15a) - ‘우리’
선지자가 통찰하고 있는 너희와 하나님의 단절은 다름 아닌 ‘너희 죄악’ 때문이다(1-2a). 이유가 하나님 편에 있는 게 아니라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2b)는 메시지는 참으로 적절하고도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죄는 이처럼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 이는 우리 또한 자유롭지 못한 메시지가 아닌가.
결코 평강이 없는 죄의 구체적인 모습이 지적된다(3-8). 온 몸이 죄에 물들었고(3), 이에 따라 진리와 공의는 허망한 것과 거짓으로 대치되어, 그 결과 죄를 잉태하고 생산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4). 이렇게 해서 자신은 죄악된 행위에 의해 죽게 되고(5), 다른 사람들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파멸케 할 것이다(6-7). 지금 선지자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러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를 지금 그대로 선포(설교)하고 있음이다.
“그러므로”(9a)
선지자를 통해 통렬한 비판을 받았던 ‘너희’가 이 설교를 듣고서 자신들의 죄악을 자백하고 회개하는 ‘우리’가 된다(9-15a).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신들의 모습이 공평과 의(빛과 밝은 것)로부터 멀어진 어두움과 캄캄한 소경과 같은 상태에 있음을 깨닫는다(9-10). 그러니 아무리 부르짖어 보아도 하나님의 들으심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11).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가를(12-13), 그리고 자신들의 삶이 이웃들과의 사이에서 또한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가를 알게 된다(14-15a). 하나님의 말씀은 이를 듣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게 하고, 또한 자신의 모습을 이웃과의 관계에서 깨닫도록 해 준다. 이것만큼 큰 축복이 또 있을까. 어떤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말씀은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그것은 늘 이웃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결과를 초래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면 그것은 이웃과의 관계 역시 정상적으로 복원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 안에 숨 쉬는 메시지다.
하나님(15b-21) - ‘이르시되’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 떠나지 아니하리라.”(21b)
이스라엘이 ‘너희’에서 ‘우리’ 되는 일이 선지자에 의해 선포된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어서신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15b,16b) 동시에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사람 막대기로 사용하신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18)자, 열방이 이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이다(19). 완벽한 역전이 예고되고 있는 셈이다.
마침내 하나님(구속자)이 시온에 다시 임하실 것이다(20a). 그리고 또한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20b)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영토록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21). 무엇이 말인가. 회복된 우리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말이다. 왜냐하면 말씀만이 희망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1-8)를 ‘우리’(9-15a) 되게 하니까.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의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는 한 우리가 다시 너희 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이클(cycle)은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고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말씀에 의해서 말이다.
부스러기 묵상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12b)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서 있는 선지자를 생각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보며 탄식한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아멘’으로 화답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둘 사이의 메시지의 주고받음을 보시고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 것을 말씀하신다. 선지자-이스라엘-하나님 사이의 놀라운 하모니다. 말씀을 외칠 수 있는 사람, 그 말씀을 듣고 너희에서 우리로 돌이키는 사람들, 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걸 보시면서 다시 새로운 역사를 계획하시는 하나님, 참으로 신바람 나는 만남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사야는 아니지만 이사야처럼 설교할 수 있을까. 내가 발을 내리고 사는 땅의 문제를 이처럼 통찰할 수 있는 영성을 소유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내가 하는 메시지를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뒤로 하고 나는 우리 시대를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서 읽어낼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가. 이사야의 청중이 그랬듯이 나의 메시지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가. 사람들만이 아닌 하나님께서도 내 메시지를 긍정하시고, 그 메시지를 사용해 주실까. 이런저런 질문들이 묵상하는 나를 맴돌고 있다.
이스라엘은 마치 오뚜기처럼 일어섬과 넘어짐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선지자는 저희를 포기하지 않고 있고, 하나님은 다시 저희를 용서하시며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희도 이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되지 않겠냐?”라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지 않으신다. 죄는 이스라엘을 부도나게 했다. 비록 저희가 우리 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말일 뿐 아직 행동이 따라온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저들의 고백을 받아 주신다.
하나님이 내 말을 들으시고 -나는 아직 말만 했다.- 나를 용서하시며 은혜를 베푸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받아들인다면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이 이럴 경우에 하나님처럼 언행(言行)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