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7(묵상)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Luke. 9.18-27
본문 분석
18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 세례 요한
엘리야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20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 -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첫 번째 수난예고]
2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제자도]
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수난예고 스타트
주님은 무엇인가 결정적인 대화를 시작하신다.
메시야 사역과 관련해서다. 이를 위해 동심원을 그리면서 제자들의 중심부로 찾아가시는 주님의 열정과 깊이를 보라! 한 번 포인트를 잡으시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의 깊이로 나아가시는 주님의 설교를 들어보라!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18)
우리는 종종 외부(교회 밖)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18)는 주님의 질문은 자신의 인기를 관리하려는 <팬클럽의 원조>에 해당하는가? 아니다. 이 질문은 깊은 Q&A로 나아가기 위한 서설이다. 무엇인가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해 다리를 놓는 것이다.
이는 또한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질문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우리와 예수님(교회)에 대한 Q&A는 우리 성도들의 몫이어야 한다. 세상이 우리에게 말하도록 맡겨 놓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과 진단에 맡겨 둘 그런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질적 구분을 분명히 하신다. 주님이 우리(나)에게 말씀하시는 한에 있어서만 의미가 있다. 우리의 대화를 점검해야 한다: “소년은 장난으로 호수에 돌을 던지지만 그 돌에 맞은 개구리는 죽는다.”
세상의 답변은 언제나 주님의 기대와 요구에 어긋나는 것일 때가 많다.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진리, 교회, 생명)의 편이 아니다. 노아 시대를 보라.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를 보라!(마24.37-39)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요3.3). 따라서 그에게는 오직 자기의 생각(지식, 경험, 고집, 판단)만이 옳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의 진단은 언제나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위증이다. 언제 세상이 교회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칭송한 적이 있는가. 진리를 알지 못해서다.
때문에 시선을 좁혀서 우리는 종종 내부적으로 우리의 정체에 대해서 진단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진리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포함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무엇보다도 정말 입을 조심해야 한다. ‘말’(言)은 다리가 없고, 숨을 쉬지 않아도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다. 말에는 냄새도 있고, 색깔도 있고, 분위기도 있고, 강하기도 하고, 혹은 부드럽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변화무쌍한 실체이다. 살아있는 카멜레온이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많은 경우 사단이 나는 것은 말에서 시작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
나를 향해 주님이 질문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신앙이 깊어지면 주님의 마음을 듣고 알 수 있는 깊이가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혹시 “언제까지 내(예수) 속 썩일 거냐?” 식의 질문들만 잔뜩 받아 들고 있지는 않는가. 제자들처럼 이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 보고 싶은 거룩한 열망을 품어야 한다. 자신을 서서히 하늘나라 대변인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베드로의 대답을 보라. 우리 주위에 일반적인 <세상 사는 이야기>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실감나게 잘 하는데, 성경(믿음, 하나님, 교회) 이야기만 시작되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갑자기 두 얼굴의 사나이가 제법 많다. 하지만 베드로처럼 분명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 한다(벧후3.18). 선지자 호세야는 “이 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4.1,6; 6.2)라고 말씀한다.
첫 번째 수난예고(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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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23): 제자도
핵심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사명이자, 명령이다. 여기 23-24절 말씀은 <첫 번째 수난예고>를 하신 후에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드디어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다. 그것도 9장에 이르러서다. 그렇다면 이것은 주님이 비장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물으신 질문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전도(복음)의 발걸음으로 유대를 순회하고 계시는가를 밝히신다. 동시에 드디어 제자들에게 자신이 무엇 때문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가를 밝힐 때가 -그것도 9장에 이르러서!- 되었음을 아셨다. 당신의 사역이 갈보리 십자가로 집중되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다시금 사역의 초점을 분명하게 제시하신다. 방향은 바로 예루살렘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선포되는 시점(22)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점에서 수난예고는 이 단락의 중심이다. 제자로의 부르심이 소개되고 있는 누가복음 5장 1-11절에서 주님은 당신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공개하지 않으셨다. 알아 듣고, 깨닫고, 바르게 고백할 때다. 그렇다면 이제 메시야 사역을 볼 수 있는 수준으로 들어섰다는 뜻이다.
본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다음 3가지를 말씀하신다. [1] “자기를 부인하라!”(23) 쉽게 말하면 “나는 없어져야 한다.” 그런 말이다. 어떻게 없어질 수 있는가? 지구를 떠나야 하는가. 그런 말이 나이다. 말씀 앞에 설 때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내가(엡2.1-3)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나를 부인한 것이 아니다.
[2]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23).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훨씬 어려운 방법으로 살겠다는 실존적인 결단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철저하게 거꾸로 사셨던 우리 주님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가는 길(선택, 가치관, 방식)과 성경이 말하는 삶의 정황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3]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라!(24) 나를 위해 살면, 주님은 없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살면 내가 비로소 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paradox)이다. 주님께는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무리 → 너희 → 나(18,20,23):
우리 주님은 영적 포위망을 점점 좁혀 오신다. 더 깊은 신앙으로 이루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열망하라!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한, 그래서 모든 것을 승부할 수 있는 영적 깊이로 나아가라! 정리하면, 예수님은 지금 어떤 단계에서 나에게 시선을 주고 계시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주님과 눈높이를 맞추었는가. 아니면 아직도 초점이 틀린가.
무리들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다니는 수준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사람은 노는 물이 중요하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하다. 무리들의 곁에 빈둥거리지 말고 빨리 주님이 실존적으로 ‘나’에게 질문하는 곳으로 신앙의 이동을 시작하라!
하나님의 뜻(부르심, 소명)은 깨닫아 아는 것이 아니라 알려지는 것이다.
주도권을 주님이 쥐고 계신다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서기까지 성장해야 한다. 특별히 先 신앙고백, 後 소명이라는 본문의 경사도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이미 누가복음 5장 1-11절에서 우리가 확인한 진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