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0(묵상)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Luke. 4.14-30
본문 관찰
은혜의 해를 선포하다(14-22).
나사렛에서 복음이 배척을 받다(23-30).
주의 은혜의 해
마침내 우리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을 알린다.
이를 이사야가 기록한 본문의 말씀을 자신이 응하고 있고, 바로 이것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으며,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복음사역을 시작한다라고 선포한다. 바로 이 말씀이다(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은혜의 해’라는 것은 쥬빌리(‘희년’)다. 안식년이 7번 차면 49년, 그리고 50년 째가 희년인데, 희년에는 모든 빌렸던 것을 다 돌려주고, 노예들도 다 해방시켜 주며, 땅도 원 주인에게 다 돌아가는,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쥬빌리’(희년)다. 하지만 다시 또 놀라는 것은 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모두가 다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는 점이다(22- )
복음을 전파하다(14-22).
[1] 예수님이 오신 것은 ‘모든 것이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본문 19절의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약을 완전히 이루는 ‘쥬빌리’, 즉 희년의 완성이야말로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사명이라는 선포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목적하셨던 인간의 원초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신분이다. 세상 속에 살고 있으나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이 우리의 신분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금 이루고 계신다라고 선포하신다. 마침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임하셨고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셔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게 찾고, 묵상하고, 결단하고, 행해야 할 자들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를 쉽게 그리스도를 믿도록 박수쳐 주지 않는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그것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와 등을 돌려야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예수를 믿어야 하는 그것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그것 때문에 내 빰에 눈물이 흐르는 말이 찾아올 수도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피를 토하는 기분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가 우리의 삶에서 언젠가 있게 될 것이다.
결코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는 그것이 화려한 승리의 길만이 아니다. 그분은 비장하게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당신이 응하겠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의 후예들로서 그리스도를 믿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우리들의 삶 또한, 주님이 말씀하신 ‘쥬빌리’를 성취해야 할 백성들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3] 종종 우리 가슴 속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무엇인가가 끌어 오르곤 한다. 물론 늘 넘어지고, 늘 낙심하고, 항상 똑같이 휘청거리며 살 수 밖에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가끔씩 우리 마음속에서부터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네 삶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않느냐 하는,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는 것을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4] 특별히 성경 말씀 속에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고, 그것이 주님의 사역이었고, 또 제자들의 사역이었고, 또한 이 시대 믿음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사역이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고, 그 가난한 자들이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이 시대 또한 가난한 자들을 향한 복음이 전파될 수 있어야 되고, 가난한 자들이 교회가 전파하는 복음을 받아들 일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선포하셨던 것처럼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대는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시대’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복음을 배척하다(23-30).
하지만 고향 나사렛은 “이 사람이 오셉의 아들이 아니냐”(22b)라며 사실상 복음을 거부한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으니라.”(24) 그러나 복음을 거절하는 것으로 끝은 아니다. 이에 지불하야 할 값은 삶 전부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드시는 예는 매우 구체적이다.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의 흉년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25) 대신에 이방 시돈 땅의 사렙다 과부가 떡의 은혜를 입었고(25-26),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 대신에 수리아 사람 나아만이 치유의 은혜를 입었듯이(27), 만일 이스라엘이 메시야의 은혜를 거절하면 구약의 때처럼 지금도 이 은혜가 이방인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22절을 넘어 더 적극적으로 크게 화를 내고(28),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29a), 급기야 낭떠러지 아래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기까지 정면으로 하나님의 나라 복음과 예수님을 거부한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 시작되자마자 두 길로 나누어진다.
믿고 따르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는 자들이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또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메시야)를 거부하고 대적하며 훼방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복음에 대한 찬반 반응은 동일하다. 이는 노아시대에도 그랬다. 방주가 지어져간다는 것은 ‘홍수심판’과 ‘방주구원’이 곧 임박했다는 뜻 아닌가. 이는 예수님의 재림 때도 동일하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구원과 심판이라는 두 이야기가 같이 집행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흉년이라는 죽음의 때에 사렙다의 한 과부처럼, 나병이라는 불치병에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새로운 삶이라는 은혜를 받는 것은 모두에게 허락되고 열려있는 길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거절하였고, 그래서 흉년과 질병 앞에 하나 둘 장례식장으로 들어갔지만 그러나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믿음의 손을 내밀어 받는 것, 이것이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된다. 이 놀라운 복음이 지금 우리에게로까지 왔다. 분명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