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19(양무리교회)
사울,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1 Sam. 14.1-52
본문 관찰
사울의 첫 번째 불순종(13-14장): 블레셋(믹마스) 전투
요나단의 믿음과 용기(14.1-23): 승리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14.24-46)
사울의 업적과 족보(14.47-52)
사울, 자수성가를 꿈꾸다.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
그(사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삼상9.15-16a)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을 신뢰한 믿음으로 블레셋을 물리친다(1-23).
하지만 전투 중에 사울의 명령을 듣지 못한 요나단은 사울의 ‘금식 명령’을 어기게 되고, 이에 죽음의 위기를 맞는 등 사울의 나라는 혼돈스럽기만 하다(24-46). 무엇보다 사울의 시행령(24), 그러니까 ‘금식 명령’에는 하나님의 명령([1])이 없다. 이처럼 소명([1])도 없고, 율법에 기초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도 없다. 이처럼 사울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중이다.
그럼에도 사울은 승전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는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47-48; [1] 참조). 이것은 사울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약속([1])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이다. 이것으로 볼 때 적어도 사울의 왕권은 무조건 부정되지는 않는다(왕권의 한계, 47-52).
요나단(1-23): 왕 같은 아들
[요나단] - 하나님 쪽으로 달리다.
[1] 삼상9.15-16a - ‘그(사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사울이 … 이스라엘 사람 3,000명을 택하여 …
1,000명은 요나단과 함께 … 있게 하고 …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삼상13.3a)
*그런데 아버지 사울왕은?
[2]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삼상13.13b-14)
*그러나 아들 요나단은?
“요나단이 …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1)
“요나단이 … 우리가 …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6)
“요나단이 …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10 → 12b)
→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하나님이 떨리게 하심이었더라).”(15b)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23a)
왕은 아버지 사울이고, 그러면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앞세우고 전쟁을 이끌어야 맞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해 왕으로 세워졌으니까[1]. 그런데 아들 요나단이 왕 같아 보인다. 그가 블레셋 전쟁을 이끌고 있어서다(13.3a, 14.1,6,12). 특별히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것을 우선하기보다는 전쟁의 형편이나 상황을 앞세울 뿐 아들 요나단보다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18-19). 여전히 전쟁의 중심은 사울이 아닌 요나단이다(1,6,12a,21-22). 왜 그런가? 사명[1]을 잃어버려서다. 믿음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도 없어서다.
하나님은 그런 사울과 그를 통해 세워질 사울왕조를 이미 버리셨다. 그러나 사울은 아들 요나단을 통해 왕조를 이어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위험하고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과 결정을 거역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2]). 더 아픈 것은 이것을 자수성가(自手成家), 그러니까 인수성가(人手成家)로 이루겠다는 사울의 모습이다.
사울(24-46): 어리석은 맹세
[사울] -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다.
[1] 삼상9.15-16a - ‘그(사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 [2]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삼상13.13b-14)
*그럼에도 사울은? 자신의 사명 [1]을 고백하지도, 이것을 다시 붙들지도 않는다.
회개도 없다. 그리고 고작 한다는 것이...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17a)
“사울이 백성에게 …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24)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37)
→ 요나단 - ‘벌집의 꿀을 … 입에 대매’(27)
→ 사울 -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하노라.’(44)
백성 -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45b)
“사울이 요나단에게 …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삼상20.30-31)
사울은 13장에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13.13b-14). 그럼에도 사울은 하나님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먼저, 흥미로운 것은 사울에게 있어서 블레셋은 ‘내 원수’(24)일 뿐이다. 이것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전달된 메시지[1]와는 다른 시각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9.15-16a) 다른 하나는 그래서일까, 전쟁은 아들 요나단이 중심이었으나, 이 전쟁의 주도권을 과도하게 자신의 명령 쪽으로 끌어온다. 고작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24)
이처럼 점점 사울은 어리석어지고 있다. 더 심각하고 무서운 것은 이 명령(24)의 자리에 진정 있어야 할 것은 사울의 ‘금식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1]에 대한 성취 선언이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고작 자신의 헛되고 악한 맹세가 중심이다(24).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1]을 고백하지 않는다. 사명과 소명[1]이 없다. 마침내 한 사람의 그릇된 욕망에서 비롯된 –사울의 선언은 하나님의 말씀[1]을 성취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사울의 선언은 어떻게 되는가. 결과적으로 24절 이후에 일어난 일은 백성들이 허기진 나머지 고기를 피째 먹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 이어질 뿐이다(31-34; 레17.14, 신12.23).
이 일에 대한 후폭풍이다(36- ). 사울은 공식적으로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이 드러났다(37).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고(19), 하나님께 받은 사명[1]도 아니고 율법도 아니다. 단지 왕의 시행령(24)을 점검하는 말을 할 뿐이다: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38b) 결국 하나님을 찾지도 구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죄인 사울이 ‘하나님과 동역’(45b)한 요나단을 죄인으로 잡고서 그것도 모자라 이처럼 율법보다 강한 왕의 또 하나의 시행령을 발동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39)
하나님과 상관없는 언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배한다. 이게 사울이 보여주는 참담함이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고 앞세우며 블레셋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요나단은 죽음의 위기에 처해지고,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율법을 넘어선 언행을 앞세우는 사울은 심판자의 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사울은 백성들에 의해 거절된다: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45b) 이렇듯 사울은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만다.
부스러기 묵상
“사울이 …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47)
“사울의 아들은 … 아내의 이름은 … 아버지는”(49-51)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 ”(52)
사울은 나이 40세에 왕이 되어 40년을 다스린다(13.1).
전쟁에 승리하고(47-48),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낳고(49-51), 군사들이 있다(52)... 또한 왕 같은 아들 요나단이 있다(49a).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사울의 왕권은 무조건 부정되지는 않는다(왕권의 한계, 47-52). 그렇지만 사울은 13장에서 왕 2년에 이미 버림받았다(13-14). 그리고 하나님은 사울의 뒤를 이어갈 왕을 예고하신다[2]. 그 왕은 아들 요나단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울의 마음은 여전히 요나단이 자신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삼상20.30-31) 하나님이 정하여 세우시겠다는데 사울은 요나단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인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하나님 위에 왕 사울이 있는 셈이다.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이것은 사울왕조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심까지 사울에게 전달되었다([2]). 그럼에도 사울은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아들 요나단을 통해 왕조의 이어짐을 도모한다. 하지만 그 사울은 자신의 입으로는 요나단을 저주하면서까지다(24 → 39 → 44). 사울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14장에 숨겨진 그림이다.
왜 이처럼 사울은 추락하는가. 14장의 사울에게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1].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 그러니까 사울의 통치에는 하나님이 없다. 더 놀라는 것은 지금 사울이 살아가는 시간들은 그가 성령 안에 있을 때였다는 점이다. 사울은 사무엘상 10장에서 그에게 성령이 임한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10.10b). 그리고 사무엘상 16장에서, 다윗이 첫 번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성령에 사울에게서 떠난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16.14a)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사무엘상 10장과 16장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는 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럼 무엇인가. 사울은 성령 안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본주의적인 사람으로 살았다. 회개할 줄도 모른다. 단지 주술적이고 습관적으로 가끔, 그리고 공식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을 뿐이다. 두려울 만큼 놀랍고 큰 충격이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다. 하지만 이처럼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사울은 무너지는 중이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만 이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일까. 이를 되돌리려는 그 어떤 시도도, 언행도, 뉘우침도, 반성도 보여지지 않는다. 이 부분이 더 아프고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