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30b(묵상)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구원
2 Thess. 2.13-17
본문 관찰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이를 위하여 … 너희를 부르사
우리의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 지키라
예수 그리스도와 …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이 땅에서 알아가고 발견되는, 그러니까 탐구(학습)를 통해서 터득하여 발견하여지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반대로 자신을 친히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그러니까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당신을 아는 자리(지식)로 나아오도록 은혜를 주신다. 그 결과 사랑을 입은 사람들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고, 느끼고, 경험하고, 믿고, 따르고, 함께 호흡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은 적그리스도라는 폭풍우 속에서도 이 거룩한 일들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펼치시는 은혜의 세상,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구원의 파노라마가 아름답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구원(13-15)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교회를 흔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데살로니가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1-12 → 13). 바울은 철저하게도 그 이유를 땅(사람)이 아닌 하늘(복음, 진리)에서 찾는다. 바울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감사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이 만든 ‘다른 복음’(이단, 갈1.6-10) 때문에 영광스러운 구원의 은혜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복음의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바울의 영적 전략이다.
그럼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를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선택하여 주셨다는, 그리하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13b, 현대인의성경)이라는 타협할 수 없는 선명한 복음을 인해서다. 진리를 혼란케 하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사람을 파멸케 하는 이 땅의 거짓된 초청이지만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부르신 초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14)다. 이처럼 길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제 데살로니가교회는 이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서” 이미 바울을 통해 전해 받은 복음(‘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힘써 지키며 살아야 한다(15, 3.6, 고전10.23, 딤후2.1-2 참조). 바울은 달콤한 입술언어로 저들을 설득하지 않고 적그리스도라는 역풍을 무력화시킬 만큼 강렬하고 순전한 복음(‘선명한 복음’)의 나팔을 높이 듦으로써 혼미해져가는 데살로니가교회의 영적 흐름을 역전시킨다. 오직 바른 복음만이 상처 나고 병든 영혼을 깨어나게 하며 치료한다는 것을 바울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성도의 소망(16-17)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또 굳게 하시기를 빌고 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는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바울의 소망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간섭(개입)하시기를 기도하는 바울에게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바울의 신앙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요3.16, 요일4.7-11). 하나님은 영원한 위로를 은혜로 주신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b) 또한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1-1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친히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세게 하신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바울의 축도(축원, 축복)에 들어있는 희망이다. 자신은 한 발 옆으로 비껴나 있는 바울의 겸손함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추측일까. 그는 자기가 데살로니가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를 절망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이끈다. 바로 이 점을 바울에게서 배우고 싶다.
부스러기 묵상
[종말 & 재림의 영성]
❶ 감사(2.13-14):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성부 -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 - 거룩하게 하심과
성자 -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❷ 말씀(2.15): “굳건하게 서서 … 지키라”
설교 - 말로 … 가르침을 받은
서신 -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❸ 기도(2.16-3.5):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축도(2.16-17)
기도 요청(3.1-2) -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3.3-5) - 너희에 대하여는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귀하고 소중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사 … 부르사”(13-14) 거룩과 구원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시고 … 굳게 하시기”(16-17)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때문에 바울은 이 소망을 기도에 담아 축원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라는 암초를 만나 잠시 데살로니가교회가 흔들리는 것 같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와 자녀들과 함께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 아닌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바로 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Knowing God).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Knowing about God)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이 둘을 혼돈하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사실조차도 모르고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한 ‘관계’의 문제이지, 그분에 관한 지식적인 인지(습득, 암기, 정보, 자료)가 그것의 핵심은 아니다. 따라서 전자(前者) 없는 단순한 후자는 바리새인과 같은 것이며, 후자(後者) 없는 전자는 자칫 맹종과도 같은 신앙의 주관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매우 위험스러운 것들이다.
이 양자의 균형을 따라 ‘굳게 서서’ 복음을 지키며 살아야겠다(15). 하지만 이처럼 사는 것의 기준 역시 내 상식과 지식과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그러니까 선포된 말씀(설교)과 기록된 말씀(성경)을 통해 배운 교훈이어야 한다. 꾸준하게 지속되는 영적 성장과 성숙을 가능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바울의 통찰에 아멘이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때문에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일어서 보려고 바둥거리며 사는 인생이 얼마나 불쌍한가. 이미 이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렸기에, 그래서 그것만큼 삶의 여정에서 만난 문제를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흘러가는 삶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가를 바울은 가르쳐 준다. 하나님만을 바라봄이 희망이다. 적그리스도라는 돌풍 앞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라는 멋진 멜로디를 앞세우는 바울처럼 오늘이라는 삶의 호흡 속에서 또한 감사 리스트를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