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 페스티발(눅 24.13-35)

20210405(묵상)

 

 

 

엠마오 페스티발

Luke. 24.13-35

 

    본문 관찰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5-27)

  

 

엠마오 도상에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사도신경 )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 늦은 오후쯤이다(21b,29).

첫 번 부활절이 저물어갈 즈음 새벽에 일어난 일들을 여인들을 통해 듣고서도 제자들 중 둘은 여전히 슬픈 빛을 띠고서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9-13,21-24). 이들은 부활사건을 마치 신문기사 다루듯 처리해 버린다. 믿어지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14). 그럼에도 주님을 저들 곁에 서서 구약을 풀어 주시면서 당신의 고난에서 부활까지라는 구원의 서사시(27)를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아직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신 것을 모르고 있었다(31). 그러나 성찬을 나누는 일을 통해 비로소 주님의 현현을 경험하게 된다(30-31). 떡을 뗄 때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게 된 것, 은혜의 한 통로로서의 성찬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 이들 두 제자들은 그리고 곧바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부활의 복음을 서로 나눈다(32-35).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13-32)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13). 이들은 고난주간에 예루살렘에서 되어진 예수님의 일들을 서로 주고 받으며 이야기하는 중이었고(14,18-23), 전체적으로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17b). 놀라운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15b-16)고 있다는 점이다.

저들의 이야기가 조금은 공허하고 무력해 보이는 것은 토론하는 이야기의 핵심이랄 수 있는 주님의 부활이 거기서 빠져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고난주간의 정보들과 자료들을 알고 있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나(13-16), 그리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나(17-27) 저들은 아직 부활의 영광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생각해 오는 주제이지만 천사들이 전해 준 소식을 듣고도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했고(8-11),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나타나 말씀하심에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면(15-16), 그렇다면 과연 초대교회는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믿고, 그분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 모두가 다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나야만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주님은 불과 부활 후 40일 동안을 지내시다가 승천하셨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대면하지 못한다할지라도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본문은 이에 대한 중요한 몇 가지 힌트들을 제공한다. 먼저, 두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 고백한 것 가운데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는 저들의 고백이다. 주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선포될 때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느낀다. 또한,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30)는 순간이다. 이처럼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현존을 느낀다.

교회는 늘 언제나 말씀(25-27,32, 10.44)과 성찬(30-31)을 통해 -후에 기도를(49, 2.1-13, 8.16-17) 통해서도- 주님의 함께하심이라는 은혜를 얻는다. 이 놀라운 은혜가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서 주어지고 있다. 이처럼 믿음 없는 자들도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리고 성찬을 함께 나누면 눈이 열리고 주님을 알아보게 되다니 신기하고 놀랍다. 아니, 이를 주님 편에서 보자면 이처럼 믿음 없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자들에게도 말씀해 주시고, 성찬을 나눠주시니, 그뿐 아니라 이를 통해 당신의 부활을 알리시니 감사할 뿐이다.

   

 

다시 예루살렘으로(33-35)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곧바로 가던 길을 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거기에는 사도들과 그 동료들이 함께 모여 있었고, 베드로도 이미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였다(34). 아마도 예루살렘의 어느 한 곳에 이미 부활의 주님에 대한 소식을 천사들로부터 들은 그 여자들’(1,8), 부활의 주님을 만난 베드로(34, 고전15.3-7),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 주님을 만난 두 제자들과 사도들의 동료들이 모여 있었던 것 같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체포되던 날 다 주를 버리고 흩어졌던 제자들이(14.50) 어느 틈에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서 요 며칠 동안 이곳저곳(이사람 저사람)에서 모아지는 부활의 소식들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부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부활을 믿은 것은 아직 아니다(41). 예수님과 지근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 정도니 첫 번 부활절 페스티발은 좀처럼 흥이 나지 않고 있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부스러기 묵상

 

첫 번 부활절 시즌(season) 치고는 실망이 크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는 주의 말씀처럼 마침내 영광의 때가 임했다. 그럼에도 저희들은 개 닭 보듯 하고 있다. 도대체 죽음의 세력을 꺾고 생명의 부활로 사망을 정복하신 주님을 이런 식으로 맞이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이게 첫 번 부활절을 소개하는 예루살렘의 표정이니 이를 어찌하랴.

잠시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목에 서본다. 제자들이라는 자들의 수준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무엇보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에서다. 특별히 21절에 나타난 말의 뉘앙스(nuance)가 좀 뭐하다. 그러니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는 말 아닌가. 그러면 부활은 고사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에 대해서 전혀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얘긴데, 이런 자들이 제자라니 한숨이 절로 난다.

그러니 부활에 대한 간증이 고작 립서비스’(lip-service, 22-24)에 불과한 [라면칼럼] 혹은 [카더라통신] 수준 아닌가. 이런 복된 소식을 들었음에도 믿음이 없으니 이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가하게 엠마오로 낙향(落鄕)하는 것 아닌가 싶다. 지금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껏 동행하며 대화를, 그러면서 성찬을 나눈 분이 부활의 주님임을 알아보고서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것만 봐도 이런 추측은 크게 빗나간 것은 아닌 것 같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

 

주님의 책망의 초점은 저들의 믿음 없음이다. 하지만 주님은 여기서 끝나지 않으시고 저들의 믿음 없음이 믿음 있음으로 바뀌도록 말씀으로 저희들을 섬겨주신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7) 구약은 오실 메시야를 내다보고 있고, 신약은 오신 메시야를 증거(확증)한다. 지금 주님은 구약과 신약을 이처럼 보도록 복음의 빛에 비추어 가르치신다.

하지만 말씀은 때로 그것이 역사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제자들 역시 부활의 소식을 들었을 때와 그것이 믿음으로 역사된 때는 조금 달랐다. 엠마오로 가는 오후 노중(路中)에서 들었고(13-28,32), 그 말씀이 성취된 것은 저녁 머물던 곳이다(29-31). 그리고 응하여진 말씀에 응답한 것은 역시 저녁 이후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33a)

이 모든 시간표(정거장)의 중심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서 계신다. 긴 노중을 함께 해 주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저녁까지 함께 유()해 주시며 성찬까지 나눠주시면서 지금 저희 앞에 서 계신 부활의 주 당신과 눈높이를 맞추어 주기를, 그리하여 부활의 복음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기를 기대하셨다. 그러셨기에 거기까지 참으시고, 기다려 주시고, 믿음 없는 저희들을 신뢰해 주신 것이다.

이렇듯 주님으로부터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목적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지금 당장의 모습이 아닌,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 있을 지금 너머의 모습 앞에 당당히 설 것을 믿는 것만큼 믿어주고, 주님처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13.1)하며 살아가고 싶다. 기다릴 줄 아는 자가 큰 자이며, 이기는 자이자, 최후에 웃을 수 있는 자다. 지금은 두 제자들처럼 슬픈 빛을 띠고”(17b) 살아야 할 때가 아니라 주님처럼 그런 자들일지라도 품고 갈 때다. 역사는 언제나 그들 쪽이 아닌 주님 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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