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 부활절(눅 24.1-12)

20210404(묵상)

 

 

 

첫 번 부활절

Luke. 24.1-12

 

    본문 관찰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b)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6a)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6b)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8)

       이 모든 것을 알리니(9)

       사도들은 믿지 아니하나(11)

       베드로는 무덤에 달려가서 들여다 보니(12)

 

 

기억하라!

 

주님이 무덤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그런데 이 약속을 아무도 기억치 못했고(6-7, 9.22), 또한 믿지 못했다. 때문에 여자들은 죽은 시체를 위한 몇 가지 용품들을 들고 무덤을 찾았고(1), 제자들은 여인들을 통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11).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는데 여인들은 아직 장례식 중이고, 제자들은 믿음 없음으로 첫 번 부활절을 맞이한다. 도대체 첫 번 부활절을 어떻게 맞고들 있는지, 이래도 되는 것인지, 그럼에도 부활의 아침은 이렇게 밝아오고 있다.

   

 

부활의 첫 열매: 부활의 증인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8)

 

그 여자들’(1, 23.27,49,55-56)안식 후 첫날 새벽에죽은 시체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님이 묻혀 계신 무덤을 찾았다(1). 주님을 만나러 간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예수의 시체를 보러 간 것만은 사실이다. 장례식이 진행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시체가 보이지 아니한 것 때문이 근심한다. 그렇다면 여인들에게는 부활의 신앙이 없었다는 얘기다. 놀랍게도 부활절 아침은 이렇게 밝아왔다.

부활절 첫 아침의 풍경은 일단 근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기쁨은 사라지고 근심만 남는다. 이것은 부활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는 눈이 없으면 모든 영역에서 이처럼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발걸음들로 채워지게 된다.

한편 이 여인들의 열정(열심)은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바른 지식과 신앙에 기초하지 않은 열심은 때로 본질을 호도할 수 있다. 열심만 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며, 무덤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으로 저들의 불신앙이 덮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따라서 단순한 돌격대식 열정만을 앞세우지 않기로 하자. 삶은 물론 사역에서 또한 열심히라는 것이 주의 일을 하고 있다는 부동의 기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로 이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여인들의 곁에 서서 부활절 메시지를 전한다(5-7). 짧았지만 매우 강렬한 메시지였고, 저들의 지난 무지를 책하시지만 그러나 더 큰 세상, 그러니까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자로서 주님 앞에 서게 되기를 희망한다. 역시 이 일의 기초는 이미 주께서 하신 말씀에서, 그리고 이를 기억하는 것에서 찾는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든지를 기억하라!”(6b,7, 9.22).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27.63)

 

천사들이 전한 첫 번 부활절 메시지는 즉각 여인들의 기억에서 주께서 해 주신 수난예고의 말씀이 생각나게 했다(7,8, 9.22). 그리고 마침내 빈 무덤에서 듣고 보고 기억한 사실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9-10) 전하였다. 하지만 제자들 역시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11)한 반응을 보였다.

먼저는 부활의 현장을 보았으면서도 믿지 않았고(여인들), 이번에는 부활의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믿지 않았다(제자들). 하지만 놀랍게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부활의 복음(7, 9.22)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27.63). 한편 셋(여인들, 제자들, 바리새인들) 다 이를 기억했지만 그러나 결과는 모두가 다 달랐다.

여인들은 듣고 믿었으나, 제자들은 듣고 그녀들의 말을 허탄하다 치부해 버렸고, 바리새인들은 지식(진리)을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는 사악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동일한 복음이 이처럼 다르게 분광될 수 있다는 것, 좀 복잡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건 그렇고, 제자들은 여인들을 통해 자신들이 이미 예전에 받았으나 잃어버린바 된 주의 말씀이 생각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곧바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방해했을까. 역사적 부활임에도 이를 믿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행간(行間)을 읽으면서, 그럼에도 제자들의 처신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는 것만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또 뭘까.

   

 

부스러기 묵상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전해 준 부활의 소식을 좀 더 생각해 본다.

아마도 여인들은 자신들에게 천사들’(23)이 그랬던 것처럼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이미 주께서 해 주셨던 수난예고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다시 제자들에게 기억하도록 반복해서 이야기했을 것이다(9-10). 이처럼 여인들 자신들은 듣고 기억이 나고,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아직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믿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제자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고,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좀 궁금하다.

무덤을 가로막고 있던 돌은 열려있고, 주님을 안장했던 자리는 비어 있고, 주님은 그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 부활에 대한 기대(신앙)를 전혀 갖지 못했던 여인들로서는 적잖게 당황했을 것이고, 이 돌발 사태를 어찌 받아들이고 풀어가야 할까를 두고 짧은 순간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바로 그때 부활의 소식은 천사들’(23)에 의해 여인들에게 전해졌다. 놀라운 것은 주께서 친히 부활하신 현장 바로 거기에 있었다고 해서, 혹은 부활의 증인들로부터 주님의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들었다고 해서 부활을 다 믿게 된 것은 아니다는 점이다. 이것은 메시야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구원 현장 가장 가까이에 있는 두 강도 중 한 강도만이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미 주님은 약속(예고)대로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자기 생각들을 앞세우면서 아직 부활 밖의 어두운 돌무덤에 갇혀있다. 진리보다도 자기 경험과 상식의 세계를 더 신뢰하고 따르는 육에 속한 제자들, 이들에게서 나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다름 아닌 제자들이 들은 바 부활의 복음을 허탄(虛誕), 즉 부질없는 헛소리쯤으로 여인들의 간증을 폄하하는 것을 보면서 더 그렇다.

복음은 물론이고 그것을 전해주고 들려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중하고 귀하게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또한 듣게 된 아름다운 복음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며 살아야겠다, 바로 그 여자들처럼! 시작은 비록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복음을 듣고, 들은 바 복음을 통해 믿음을 얻고, 그래서 이것을 증거하는 삶의 자리로 나아가자, 바로 그 여자들처럼! 복음이 멈춰 있게 할 게 아니라 이 생명의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지도록 여인들의 뒤를 따라 부활의 증인(증거자)로 살아가 보자, 바로 그 여자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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