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누구?(눅 23.1-25)

20210331-0401(묵상)

 

 

 

그들은 누구?

Luke. 23.1-25

 

    본문 관찰

 

    빌라도의 심문(1-7)

       헤롯 안디바의 심문(8-12)

    빌라도의 심문(13-25)

  

 

빌라도/헤롯 vs 무리들

 

    재판 과정

    안나스(18.12-14)

        → 산헤드린 공회(22.66-71)

            → 빌라도(23.1-7)

                → 헤롯 안디바(23.8-12)

                    → 빌라도(23.13-25)

 

무리(저희)는 누구인가?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22.66)과 예루살렘 백성들이다(원고). 그 상대편에는 빌라도와 헤롯이 있고(재판장), 그리고 그 정점에는 고난의 종 예수님이 서 계신다(피고). 온 세상은 마침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하여 승소(勝訴)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여 이를 관철시키려고 한다.

한편 빌라도는 여러 차례 저희의 계획대로 결정해 주는 것을 망설인다(14-16,20,22). 그러나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빌라도 자신도 인정했듯이 죄 없는 주님을 죄인으로 단죄하여 죄 값을 치르게 해야 하는 일이었다. 누가는 바로 그 틈바구니에서 무리의 사악함과 빌라도의 이중성을 고발함으로써 주님이 죄인으로 죽은 것이 아님을 이 혼돈의 법정으로부터 캐내고야 만다.

   

 

빌라도(1-7,13-25) vs 무리들

 

    “무리가 다 일어나 고발하여 이르되”(1-2a)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5a)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18a)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21)

    “그들이 큰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23) 

        ↔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4)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14b)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15b)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20)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22)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24)

 

참으로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22.53b)는 말씀이 응하여지는 소름끼치는 현장에 서 있다. 무리(그들)들은 이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했을까. 한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이처럼 목숨 걸 수 있는 자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는 따지고 보면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22.22a) 가는 일을 정확하게 성취하게 하는 자들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그랬듯이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22.22b)- 저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것 밖에 한 일이 없다. 이상하지?

이렇듯 세상에는 무리들처럼 부정적 들러리들이 많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신들의 목표와 꿈을 이루는 것이 곧 아무도 흔들 수 없는 파멸(심판)의 이유가 되는 자들 말이다. 세상과 다 바꾸어 얻은 것이라는 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는 것뿐이었다는, 하지만 주님은 바로 그 골고다에서 새 날을 시작하시는(22.69), 유감스럽게도 이 기막힌 역설을 저희는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죽겠다!”(9.22,43-45, 13.33, 17.25, 18.31-34 19.28- )며 예루살렘으로 오신 주님을 죽이겠다고 아우성치는 무리들의 몰골이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것일까. 주님은 이런 예루살렘을 측은하게 보고 계시는데(13.34-35), 정작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 외에는 다른 퇴로(退路)가 없이 배수의 진을 친다.

사실 그들(무리)이 거론해야 할 죄목은 다름 아닌 신성모독죄(神性冒瀆罪, 22.67-71)였지만 그러나 저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주님을 고소한다(2,5,14). 인간이 하나님이라 했다는 종교적인 죄목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결국은 자신들의 뜻을 이룬다. 하나님까지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 더 이상 무슨 희망이 있으리요. 인간이 자기 논리(목적)를 정당화하면 무슨 짓을 못할까 싶어 등골이 오싹할 정도다.

한편 예루살렘 백성들의 두 얼굴이 씁쓸하기만 하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저들은 찬송하리로다!”(19.38)라며 환호했지만 불과 얼마 후에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21)라며 돌변한다. 처음 저들의 외침은 자발적이며 진심에 찬 간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23b)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정당한 토론이나 판단에 의해서 법이 집행되고 의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닌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식의 결정이 참으로 초라하게 보일 뿐이다.

   

 

헤 롯(8-12)

 

헤롯이 불쌍한 것은 예수님을 단지 자신을 즐겁게 해 주는 흥미꺼리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이미 예수 이야기를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듣고 있었다. 그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는 자기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고(8.3),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안디옥교회의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그렇다(13.1). 하지만 그는 이를 통해 믿음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실패하였으며, 기회가 되면 자기 눈으로도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8b) 하는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이란 헤롯과 같은 자들을 기쁘게 해 주는 마술이 아니다. 언젠가 요한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오실 그이’(메시야)로서의 사역이 바로 이적과 기사의 핵심이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7.22) 결국 이 만큼이 바로 헤롯의 착각이다.

이런 사악한 동기를 만족시켜 줄 주님이 아니셨기에 아무 말 없이 헤롯 앞에 서 계신다(9). 한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적이 있었지만(13.31b) 가까이에서 만나보니까 만만하게 보였던 것 같다. 그러자 헤롯 역시 무리들의 편에 서서 주님을 대적한다(11). 이렇게 해서 이제 그는 주님과는 완전히 멀어지고 악인과는 친구가 된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12)

헤롯 수준의 기쁨은 그가 얼마나 주님과 초점이 다른 사람인가를 드러내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천박함은 예수님의 기적을 눈요깃감 정도로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것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편 빌라도와 헤롯 모두에게 공동의 적()인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이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것은 오히려 참 불쌍한 인생이구나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부스러기 묵상

 

    “이에 빌라도가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24-25)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사도신경 )

 

모두가 다 자기 목적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주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분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는 자 없다. 빌라도는 주님이 무죄(無罪)함을 거듭 주장하면서도 소리’(여론)에 굴복하고, 헤롯은 주님의 고난을 마당놀이 공연쯤으로 생각하였고, 종교 지도자들이나 백성들 역시 그랬다. 이렇듯 하나님과 세상의 단절, 바로 그 중심에 홀로 외롭게 주님이 서 계신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할지라도 주님만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다. 이 때문에 어떤 고난과 취급을 당한다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으시면서 말이다.

재판 치고는 우습다(?). 어떻게 된 게 무리(방청석)가 빌라도(재판장)를 이기느냐는 점이다: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24) 따라서 만일 변호사가 있었다면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세계를 재패한 로마와 그의 법이 이렇게도 허술하단 말인가. 로마가 한낮 무리들의 압력에 굴복할 정도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 누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겠는가? 빌라도마저 황제의 법보다 무리를 더 존중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무리가 원한다면 로마 황제의 목을 잡기 위해 로마를 쳐들어갈 것인가?”

이랬다면 빌라도와 헤롯은 죽사발이 되는 것인데 . 이렇듯 빌라도는 재판장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나 도덕도 찾아볼(기대할) 수 없는 비열한 사람이다(4,14b,15b,20,22). 따라서 이 재판은 처음부터 합법적이거나 순리대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이렇듯 로마나 유대가 최소한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다는 관찰은, 그러므로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들의 사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음을 의미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7)

 

이런 불법(不法)과 탈법(脫法)이 난무한 무법천지(無法天地) 속에서 과연 주님은 어제 밤부터 진행된 재판 과정에(22.66a), 특별히 빌라도와 헤롯의 심문에 계속해서 침묵하셨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22.22a), “그러나 이제는 저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22.53b)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그 어떤 언행보다 강력하고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정작 죽이겠다는 자들은 조급하고, 그러면서도 주저하며 혼돈스러운 소리만 있다. 반면에 주님은 침묵하신다.

고난의 정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이 옮겨질수록 이 소리와 침묵은 묘한 대조(‘’)가 된다.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뭔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 같은 쪽(‘무리’)과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쪽(‘주님’)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일하는 자는 누구이며, 그가 이루신 일은 무엇인가를 침묵으로 말하고 행동하신다. 이런 상황과 형편에서 주님보다 더 말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 말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알량한 나의 옳음이 오해되어진다고 입을 여는 못난이 수준인 나로서는 가히 넘볼 수 없는 차원이다. 주님이 하늘 아버지 때문에 입을 다무셨듯이 나는 언제쯤 주님 때문에 묵묵히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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