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눅 22.63-71)

20210330(묵상)

 

 

 

너는 누구?

Luke. 22.63-71

 

    본문 관찰

 

    군병들의 희롱(63-65)

       희롱하고 때리며 많은 말로 욕하더라

    산헤드린의 심문(66-71)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으니라

  

 

지키는 사람들 vs 백성의 장로들

 

가룟 유다라는 카드 한 장이 넘어가자 그야말로 속전속결(速戰速決)이다.

사탄은 유다를 넘어뜨리고 예루살렘을 정벌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 동원한다. 베드로는 물론(54-62), 지키는 사람들(성전의 군관들, 52,62-65),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66-71), 빌라도(23.1-7), 분봉왕 헤롯 안디바(23.8-12), 그리고 마침내 온 예루살렘 백성들(13-25)까지 이 거대한 질풍노도(疾風怒濤)에 합류한다: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23.23) 그 사이 이미 제자들 어디론가 다 흩어져 버렸다(14.50). 마치 도미노 게임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이제 마지막 지점에 서 있는 그 사람의 아들’(인자)은 어찌 될 것인가.

   

 

군병들의 희롱(63-65)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53b)

 

주님의 때’,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53a)는 저희들 모두는 주님께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너희 때’(53b)가 되자 날뛰기 시작한다. 이로 보건데 인간이 얼마나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졸개가 되어 스스로 악을 도모하고, 악의 편에 서서 언행(言行)함으로써 죄를 물 먹듯 하며 살아가는가를 짐작해 보게 된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이것이 주님의 편(좁은 문, 13.22-30)에 살아가는 자들의 일시적 어려움이자 십자가라 할 수 있으리라. 세상은 자신이 승리한 것처럼 부화뇌동(附和雷同)하며 어리석은 죄의 추임새를 따라 이리저리(이곳저곳)에서 승점(勝點)을 추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게 다 여자의 후손(‘인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사탄(옛뱀=마귀=사탄=온 천하를 꾀는 자, 12.9, 20.2)의 최후발악(最後發惡)이지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그 자신의 최후를 예고하는 것이자 그것을 재촉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3.15b)

이런 멸시와 천대를 묵묵히 받아내시며 자기 길을 가시는 주님을 보면서, 1원짜리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눈에 쌍불을 켜고 갑론을박하며 핏대를 올리는 죄인들의 못남과 어리석음이 우리를 고발한다. 주님도 이런 거절을 당하셨는데 우리는 평안(편안)하게, 아무 문제없이, 그러면서 승승장구하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라 생각하는 신화에 빠져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슬픈 일이다.

 

    “이것까지 참으라!”(51)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19.30)를 선언하시기까지 이를 굽게 만드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철저하게 지키신다. 베드로가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을 때에도(18.10) “이것까지 참으라!”(51) 하셨던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이 말씀을 그대로 지키신다.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아들 예수님의 순종이 눈물겹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

 

 

산헤드린의 심문(66-71)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3.4-5)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16.8-9)

 

날이 새매’(66a) 마침내 고난일(금요일) 아침이 밝았다. 사실 산헤드린 공회는 야간에 모일 수 없었으므로 지난 밤의 모욕과 천대는 불법이었다(63-65). 하지만 그 밤에 저들의 모든 계획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되었고, 이 아침의 신문은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주님은 지금 이처럼 취급을 당하고 계신다.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이 심판하는 자리에 올라 앉아있다. 이게 세상 질서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53b, 20.9-18 참조) 철저하게 역전된 그림이다. 이런 역설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 인위적이고 인간적인 구조는 다시 완전하게 역전될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

 

주님은 이미 고난을 넘어 부활, 그리고 영광의 보좌에로의 복귀까지를 보고 계신다(69). 참으로 놀라운 언행이 아닐 수 없다. 시작된 고난에서 이미 그 끝을 영광으로 이해하는 분, 고난과 영광을 분리해서 보는 것을 거부하고, 고난 안에 이미 숨 쉬는 영광을 보며, 영광이 고난을 먹고 자란 그것의 열매임을 잊지 않으시는 모습, 이것이 진정한 고난신학(苦難神學)의 정수가 아닐까.

   

 

부스러기 묵상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23.35-36)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7.25)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a)

 

지나가는 개도 자기 뜻을 펼칠 것만 같다.

이것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바로 그 세대의 모습이었다. 내가 만일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면 나도 별 수 없는 죄인이었겠지. 아마도 가장 앞서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전후좌우(前後左右) 온 세상이 다 주님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오차나 흐트러짐 없이 메시야의 길을 걸어가시는 주님을 보라!(67b-70) 소명자의 삶을 보라!

다시 예수님 오시기 약 700년 전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고난 받는 종의 노래’, 52.13-53.12)이 성취되는 순간이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53.3)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주님을 알고, 진리를 듣기 위해서 주님을 초대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를 없이하기 위해, 그와 세상을 분리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끊어내기 위해, 그리하여 언제까지나 자신들의 불의한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주님을 죽음에 내 몰았다. 저들의 언해은 진리를 알고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뭔가 꼬투리를 잡아내기 위한 갈고리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마저도, 진리마저도,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을 위해 일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소명마저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한 저들의 죄악, 생각만 해도 몸서리친다.

과연 주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하나님과 인간의 위치가 완전(완벽)하게 역전된 자리에 서서 모든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의 마음은 정말 어떠셨을까. 어찌 내가 주의 마음을 알리요 마는, 그래도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다.

좁쌀 같은 오해나 모욕감을 받아도 분하고 원통해서 길길이 날뛰는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얼굴 표정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옳고 정당함을 어떻게든 보여주고 증명해야만 속이 후련한 우리, 그래서 나는 너와 다른 사람이라고, 나는 네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밝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이런 못난 우리()와 주님이 자꾸만 오버랩(overlap)된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옳은바 되고, 그것이 증명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으셨다. 오직 하나님께 옳다 인정이 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당신 자신이 어떠한 처지로 추락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끝내 담당하신다. 이것이 맡은 자가 마땅히 구해야 할 충성이지 않을까.

때문에 나 하나 주님처럼 일그러져서 주의 뜻이 더 드러나고, 나 하나 고난의 파도 위에 올라섬으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기꺼이 이 배역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이처럼 써 주시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해 하고, 이것만큼 하나님 아버지 안에 내가 있음을 밝히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 때문에 감사해야 하는 것, 이것이 고난의 눈높이를 주님의 눈높이에 맞추는 고난의 영성이다.

고난이 없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좀 더 값지고 가치 있게 맞이하고 맛보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난을 주님처럼 고난스러워하며 보낼 수 있는 날이 올까. 자신의 죄의 값에 따른 고난이야 당연하지만 혹시 주님(교회, 진리, 타자)을 위해 받는 고통이라면 묵묵히 참아내며 이겨낼 수 있는, 일상의 삶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또한 영혼의 자리 역시 순전하게 가꾸며 그 언덕을 넉넉하게 넘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목회(牧會)란 이런 것 안에 들어있는 비밀이 아닐까. 이 비밀이 점점 내 안으로 걸어들어 오려고 한다. 목회란 주님처럼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아닐까. 다른 거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주님처럼 취급당해도 넉넉하게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내 몫의 십자가 앞에 서자. 믿음의 여정은 순례자로 살아가는 십자가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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