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눅 22.47-62)

20210329b(묵상)

 

 

 

나는 누구?

Luke. 22.47-62

 

    본문 관찰

 

    가룟 유다의 배반(47-53)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베드로의 부인(54-62)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가룟 유다 vs 베드로

 

가룟 유다의 시간표를 생각해 본다.

주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후(19.28- )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치시자 어느 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19.47)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시 주님이 가르치는 일을 하시고 계시는 바로 그 시간에 돈을 받고 주님을 저들에게 팔아 먹는다(1-6). 그랬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제자의 자리에 앉아 유월절 음식을 먹고, 이어 주께서 나눠주시는 성찬식에 참여한다(14-22). 그리고 아마 이 일이 일어난 직후에 그는 만찬 자리를 빠져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가룟 유다(47-53)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1.25b)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주님과 11명의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올라 가셨다(39). 그런데 가룟 유다만큼은 주님과 동행하기를 포기하고 그 발로 이미 언약하였던 대로 주님을 팔기 위한 구체적인 모의를 꾸몄던 그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도를다시 한 번 더 구체적으로 의논하고 점검했을 것이다: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26.48)

이렇게 해서 유다는 주께서 제자들과 기도하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52a)을 앞세우고 다시 나타났다(47-48a).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주님이 주신 떡과 잔을 받아 먹으며 첫 번 성찬식에 참여했던 그였고(14-22), 제자 중 하나가 당신을 팔리라는 말씀을 듣더니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26.25)라며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던 그였다. 그는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너버렸다.

가룟 유다를 생각한다. 그는 주님을 따르던 그 많은 사람(제자) 가운데 특별히 택함을 입은 12 제자 중 하나다. 3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을 주님과 더불어 동거동락(同居同樂)했고, 그러면서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가르침과 능력을 지근거리에서 가감 없이 맛본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유다를 실족하게 했는지 알 길이 없다(7.23).

이젠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지만, 그는 조금 전에 성찬식에 참여하여 주님이 주시는 떡과 잔(살과 피)을 먹고 마셨었다(14-22). 한편 이미 이런 자임을 다 아셨음에도 왜 주님은 이 자에게 성찬을 동일하게 나누셨을까. 어쩌면 이 대목이 목회자로서 느끼는 심리적 긴장이다. 주님도 가룟 유다에게까지도 은혜를 주는 것 자체를 가감치 않으셨듯이 우리 역시 주의 것을 임의대로 판단하여 마치 우리에게 주고 주지 않을 권세라도 있는 양 행세하는 우()를 범치 말아야겠다.

마침내 주님의 예고는 거스를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9.22-27,43b-45, 17.25, 18.31-34). 거듭되던 이 수난예고를 이루는 자들은 예상했던 대로 겉으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백성의 장로들이었고(1-6,52a, ), 거기에 내부에서 부화뇌동(附和雷同)한 자는 다름 아닌 제자 가룟 유다였으며, 저들을 밀 까부르듯 충동질한 자는 사탄이다(31).

결국 제자들도 주님을 다 버리고 떠날 것이며(26.56b, 14.50), 급기야 호산나를 외치던 예루살렘 백성들도 큰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23.23), 온 세상이 주님을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53b) 주님은 홀로 이런 세상을 품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체포되신다.

마침내 이렇게 해서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22a, 9.22-27,43b-45, 17.25, 18.31-34 참조) 이 일을 이루는 들러리들의 저주를 향한 걸음걸이는 자신들이 하는 언행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 결과가 어떤 것일지도 모른 채 자행될 것이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7.25) 이 죽음과 심판이라는 저주의 문을 스스로 열고 있는 가룟 유다, 이를 어찌할까.

 

 

베드로(54-6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베드로처럼 언행(言行)이 다른 자로 살아가고 있기에 이 장면은 대단히 멋쩍을 수 밖에 없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33)는 호언장담(好言壯談)에 주님은 글쎄다!’(34)로 대답하셨기에, 이제 베드로는 자신의 선언이 옳았음을 통해 주님의 판단이 틀렸음을 증명해 보일 때가 되었다. 과연 베드로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까. 그의 뒤를 따라가 본다.

주님은 죄인의 몸으로 취급을 당하시면서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가셨고, 베드로는 그 뒤를 멀찍이따라간다(54). ‘닭울음소리가 묘한 느낌을 주는 것은 왤까. 베드로는 물을 피워 놓은 자리에 앉아 있다. 이 그림은 그대로 부활 후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신 주님이 피워 놓으신 숯불’(21.9)과 오버랩(overlap) 된다. 베드로는 불빛을 향해 앉은 자리에서 주님을 부인했고, 후에 주님은 불 앞에서 베드로와 함께 조반을 드신다. 묘하다.

한편 베드로는 교회사의 전승에 따르면 이날 이후로 닭울음소리만 들어도 회개했다고 한다. 그는 일평생 자기 몸에 닭울움이라는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산 셈이다. 그야말로 닭 앞에서 오리발 내민 격이다. 미물에 불과한 닭도 베드로가 주님의 예고하심 그대로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자 즉시 울음으로써 주님의 예고가 옳았음을 위해 사용되는데 베드로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이 어인 일인가.

그럼 베드로는 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까. 무슨 이유 때문에 멀찍이주님 뒤를 따라가서 벼락을 맞을까. 살고 싶었을까. 이처럼 허무하게 죽음으로 끝나는 일에 참여한 것을 이제 만인 앞에서 공식적으로 아무 의미 없음을 주를 부인하는 것으로 시인하는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곧 이어 들려온 통곡 소리는 또 무엇인가.

처음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쫓았다(5.11). 그리고 그는 제자훈련 중에 이처럼 자신의 신앙을 간증했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9.20b) 또한 주님이 체포되시던 바로 전에는 호언장담을 하고(33), 체포되실 때에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리”(18.10)기까지 했었다. 그런 그가 몇 사람의 증인들의 말을 정면으로 부인(“저주하며 맹세”, 26.74)해 버린다.

주님은 너는 돌이킨 후에를 기약해 주시기까지 하셨음에도 그는 주님과는 아무런 사이가 아님을 공개적으로 선언해 버린다. 이런 씻을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한 것, 이것이 베드로의 초라한 이력서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며(13.1) 신뢰하시며, 추락 이후에 시작될 그의 새로운 인생설계도를 그에게 선물로 주신다(31-32).

그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하였을 때 닭이 곧 울더라.”(60b) 그러자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61a), 그때에 베드로는 주의 말씀이 생각났다(34,61). 그래서 그는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62).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베드로가 아닌 이상 그때 베드로의 마음과 심정을 알 길 없다.

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 역시 수 없이 주님을 배반하고 다시 회개하고, 회개하고 다시 배반하고, 이런 돌림노래의 후렴을 우리 인생의 악보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모래성처럼 그렇게 사라져주기를 기대하지만 언젠가부터는 이러다가 우리 역시 파산하는 것은 아닌지 슬슬 겁나는 게 사실이다. 이쯤 해서 이런 성인아이의 어리광은 버릴 때도 되었다. 다시 닭이 또 울어야 하는 일, 그만 하고 싶다.

   

 

부스러기 묵상

 

이 두 사람을 보라!

가룟 유다와 시몬 베드로, 이 둘은 모두 주님의 제자였다. 한 제자는 스승을 팔았고, 또 한 제자는 주님을 부인(“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26.74a)하였다. 이 일이 이루어 진 후에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였고(62, 27.75), 유다는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도로 갖다 주며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27.3-4a)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27.4b)

이에 유다는 스스로 멸문(滅門)을 선택한다: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27.5) 예초에 대제사장들에게서 사죄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이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저희는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맡긴 사명을 버리고 멸망의 길로 들어선 자들이다. 사냥이 끝나면 이에 더 쓸모없는 개()되는 이치를 가룟 유다 그만 몰랐을 뿐이다. 사탄이 쓴 유다의 용도는 거기까지다.

한 가지 여기서 다시 주목해야 할 진리는 이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뜻(섭리)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 할지라도 가룟 유다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세상에서 더 이상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을 내가 죽였다고 해서 그 살인이 무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만일 이런 유다의 논리가 정당하다면 내가 이 순간 불자(佛子)가 되어 불교(佛敎)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내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것이고, 그러면 내 죄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얼빠진 돈키호테적 발상이 판을 치는 세상이 정당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궤변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통하지 않는다.

유다는 뭐고, 또한 베드로는 무엇인가. 어찌 되었건 유다보다 더 악하고 교묘한 죄목록만 들어가는 우리는 버젓이 살아있다. 우리를 이처럼 살려두는 이유는 뭘까. 정말 불행 중 천만 다행인 것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지으며 죄와 은혜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왕래하며 마음대로 살아도 어찌된 게 우리는 언제나 베드로 쪽에 서 있다.

베드로를 돌아보시던 바로 그 눈으로 주께서 돌이켜나를 보신다. 난 어제도, 오늘도 그 눈빛을 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물끄러미 나를 보고 계신다. 어찌할까. , 이런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어이할까. 지옥가기에도 이미 틀려버린 나, 이 한 목숨 입에 물고 하늘 한번 처다 본다. 왜 이리 가슴이 시리도록 아플까. 나는 누구? 그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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