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先) 섬김이다!(눅 22.24-38)

20210328(묵상)

 

 

 

() 섬김이다!

Luke. 22.24-38

 

    본문 관찰

 

    누가 크냐(24-30)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31-34)

    검을 사라(35-38)

  

 

동상이몽(同床異夢)

 

최후의 만찬(성찬식)을 마친 이후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유산 싸움을 벌이는 씁쓸함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24) 한심하다 싶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지금 제자들의 모습(수준)인 것을. 한편 베드로의 추락은 더욱 충격적이다(31-34). 주님은 바로 앞에서 당신의 죽음(팔림)을 예고했었다(21-22). 그럼에도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다른 그림을 상상하고 있으니(24), 그리고 큰소리(장담)만 늘어놓고 있으니(33), 이를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싶어 민망할 정도다.

   

 

도토리 키재기(24-30): () 섬기는 자, () 다스리는 자

 

주님은 제자 중 하나에게 팔려 이미 작정된 죽음을 맞게 되리라 하시는데도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다툼에 여념이 없다(21-22 24). 바로 이때가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31) 몸부림치는 때이다. 그렇다면 지금 모든 제자들이 다 영적인 싸움에서 밀리는 중이라는 뜻인데, 그러니 이처럼 도토리 키재기나 하고 있는 것이지 싶다.

얼마나 실망과 낙심이 컸을까 싶은데 주님은 변함없이 더 깊은 교훈(진리) 앞으로 나아가신다. 주님은 도대체 뭘 생각하시고, 저들을 어디까지 신뢰하셨으면 이처럼 말씀하실까. 이런 생각으로 읽어가다가 주님 대() 제자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몇 가지 흐름이 눈에 띈다. 24절의 해답은 이렇게 드러난다.

먼저, 주님은 당신의 지금(이땅)의 삶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7b) 이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먹는 자와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대목이다(25-27a). 주님은 이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말처럼 사셨다. 하지만 이 구도는 지금(현재)에나 유효한 것이다(30).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역전이 주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는 구도라 하신다. 바로 이 대목이 주께서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는 저들의 지금(현재)만을 보시지 않은 이유다. 영광의 문을 열고 그리로 들어가려면 먼저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 주께서 친히 이 말씀대로 사셨던 것처럼!(2.5-11 참조)

() 섬기는 자, () 다스리는 자의 그림이 열쇠다. 그렇다면 누가 크냐?’는 문제는 지금 제자로서의 삶을 당신처럼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누가 크냐?’는 나에게 맡기고 지금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당신처럼 끝까지 섬기는 자로 살아주기를 기대하신다.

지금 제자들은 앉아서 먹는 자(지금 큰 자)가 아니라 먼저섬기는 자로 살아가게 하신 것은, 나중에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30)심이라 하신다. 주님은 거기에서 다스리는 자까지 내다 보셨고,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함을 깨우치신다. () 섬기는 자, () 다스리는 자의 연속성은 지금 내가 어떤 자로 살아가느냐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말씀, 두고두고 마음판에 새길 뿐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 성취해야 할 교훈이다.

   

 

베드로(31-34):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2b)

 

갑자기 베드로에게 대화(말씀, 말씀, 주제)가 넘어간다. 베드로 역시도 선() 섬기는 자, () 다스리는 자의 구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긍정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예외일 수 없다. 어떻든 사탄은 지금 밀 까부르듯 베드로마저도 이러한 도토리 키재기의 수렁에 빠지도록 그의 눈을 멀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31). 주님은 지금 이처럼 흔들리는 베드로를 보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를 위해 이처럼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2) 하지만 자연스럽던 이야기가 갑자기 반전(24-30 31-32)할 만큼 지금 주님을 둘러싼 분위기는 살얼음판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도통 깜깜 무소식이다.

주님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도 못나고 볼품없는 제자들을 보시면서도 저들에게 분노나 책망이 아닌, 오히려 저들을 위해 염려하시고, 사탄의 음흉한 계략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을 안내하신다(31-32). 어찌 보면 이런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 아픈 만큼 더 성숙할 수 있다는, 뭐 그리 보이는 모습으로 저들의 실패 이후를 염려해 주신다.

오히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32)하실 수 밖에 없는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31)한 그런 거대한 파도를 미리 막아주시기 보다는, 이를 정면으로 넘어서도록 저희(베드로)를 격려하시며 붙들어 주신다. 그만큼 십자가로 가는 길은 지금껏 쌓아왔던 모든 것(구약에서 십자가까지)을 삼켜버릴 만큼 크고 놀라운 속도로 주님 가시는 길을 공격해 왔다.

지금 주님은 이를 홀로 넘으셔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제자들 역시 31-32절이라는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이제야 말로 기도가 무엇인가가 리얼하게 드러날 순간이다. 주님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21.36) 명하신 것을 이제 당신이 온 몸으로 실천하실 것이며(39- ), 이를 제자들 역시 성취할 수 있도록 저희를 향한 중보기도를 아끼지 않으셨다(32).

하지만 베드로의 반응은 단호하다(33). 그러나 주님은 이것마저도 베드로가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비웃는 한 마디의 호들갑이나 통속적인 비명에 불과한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보고 계셨다(34). 이것은 기도라는 주제의 연장에서 볼 때 저들의 수면기도’(45)가 이를 증명해 준다. 어쩌면 기도 없는 저들의 몰락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9.46)

 

누가 크냐는 논쟁이 한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누가는 이런 변론(다툼)을 두 번이나 전해준다(24, 9.46-48, 20.20-28 참조). 그렇다면 아직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미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설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공생애가 거의 마쳐지는 순간까지 제자들은 이와 관련된 팽팽한 신경전을 계속해 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이 제자들을 통해서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다. 물론 저들을 동정하거나, 제자들도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넘어서기 어려운 주제였다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나의 수준 낮음을 변명하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단지 있다면 아직 끝나지 않은 숙제를 지금껏 붙들고 있는 제자들에게서 연민을 느끼는 것이고, 이는 내 안에도 이런 세속적인 기준(잣대)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음을 확인한 것에서 느끼는 죄스러움 때문이다.

주님은 성찬식을 통해 자신의 살과 피를 다 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임박한 죽음을 예고하고 계시는데 제자라는 자들은 이방인의 임금들이나 집권자들처럼 앉아서 먹는 자의 반열에 선 그런 의미의 큰 자가 되려고 서로 티격태격하며 다투고 있으니 이렇게도 서로 초점이 달라서야 제자는 얼어 죽을 제자란 말인가.

하지만 이런 내부의 심각한 균열(24)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요구한 이미 시작된 영적 전쟁이라는 전면전의 한 컷이자 그것의 연장이라는 주님의 통찰은 머리카락이 설만큼 정확하고 놀라운 사태에 대한 인식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선() 섬기는 자, () 다스리는 자라는 [섬김의 법칙] 그 자체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만큼 가공할 만 한 위력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지금 제자들에게 누가 크냐는 미끼로 저희를 부추기면서 속으로는 제자들로 하여금 선() 섬기는 자로 끝나게 만들어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제자들이 이를 알리 만무하다. 주님과 더불어 맛볼 저 땅에서의 후() 다스리는 자의 진정한 복()에 눈멀게 함으로써 지금 이 땅에서 이방인의 임금들’(집권자들, 지금 큰 자, 앉아서 먹는 자)처럼 살아버리게 만드는, 그리하여 마침내 임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이 자라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가라지 같은 생각으로 제자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 제자들을 위해, 특히 베드로를 위해 중보기도 하신 주님의 깊고도 높은 의도하심이었다. ‘누가 크냐의 수준에 있는 제자들이 무슨 힘으로 사탄의 요구를 넘어서서 그것으로부터 돌이킬 수 있으랴. 그럼에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제자들, 아니 나는 과연 누구인가. 아무런 힘과 능력도 없이 돈키호테처럼 개폼이나 잡고서 큰 소리나 지르고 있는 모습(33), 이것은 베드로의 후예인 우리의 모습 아닌가.

베드로가 넘어져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될 것을 다 아시면서도(34) 그가 완전히 파산하지 않도록 그를 일으키시고 섬겨주신 주님, ‘누가 크냐’(24)돌이킨 후에’(32) 사이에 서 있는 베드로, 이게 주님과 우리 사이의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과 마음에 우리의 꿈을 펼쳐 보이고 있고(24), 그럼에도 이를 다 아시면서까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돌이킨 후에까지의 그림을 보여주시는 주님, 이 건너뛸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이 어쩜 바울의 고백이기도 했으리라(7.7-25).

이제 이 모든 부끄러움을 다 떨쳐버리고 싶다. 다스리는 자가 되고자 하는 누가 크냐식의 어리석음, 주의 나라에 있어 누릴 모든 것을 잃게 만드는 사탄의 유혹, 믿음이 완전히 파산하려는 쫓고 쫓기는 믿음의 현장에서 벌이는 영적 사투(死鬪), 한갓 허풍에 지나지 않은 개폼에 지나지 않는 호언(好言), 이 모든 것을 다 물리치고 승리한 자의 결과적인 모습은 주님이 명하신 섬기는 자인가 아닌가에 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 숨 가쁘게 진행되는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영적 전쟁 속에서도 섬기는 자로 살아가신다(27b). 더 놀라운 것은 택하여 세운 제자들 가운데 하나까지 이 일에 합류하였고, 나머지 11명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철없는 어린아이 수준을 아직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섬기는 자로 당당하게 자신의 모든 삶의 무대를 가득 채워버리신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그럼에도 희망인 것은 주님의 기도가 있고, 그래서 다시 주어질 돌이킨 이후가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에게 열어 놓으신 이 길을 향한 문이 아직 우리()에게도 열려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길 따라 달려가 보면 그 끝에 주님이 온 몸으로 맞아주시리라는 확신을 희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앞서 가신 주님 뒤를 따라 풀어진 신발끈을 다시 동여 매 본다. 벌써 저만큼 앞서 가신 주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이 생명의 길을 향한 행진을 재촉해야만 한다. 지금은 누가 크냐!’ 따위의 소모전이나 하면서 소중한 기회의 때를 머뭇거릴 수는 없다.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만큼이 온 몸으로 다시 회복해야 할 숙제가 남아있다고 믿는다. 우리를 여기까지 믿어주신 주님을 더 실망시킬 순 없다. ‘누가 크냐!’라는 속된 이 땅의 그릇을 내려놓기가 이렇게도 힘들고 어려운 것일까. 정녕 이 무거운 짐이 언제까지 우리()를 따라 다닐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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