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눅 22.14-23)

20210327(묵상)

 

 

 

최후의 만찬

Luke. 22.14-23

 

    본문 관찰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새 언약의 만찬: 떡과 잔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14)

 

유월절 식사 자리에 모두가 다 모여 있다.

이 자리에는 가룟 유다도 함께 앉아 있다(21). 아마도 앞서기니 뒤서기니 하면서 만찬장인 큼지막한 다락방에 제자들이 하나 둘 도착을 했을 것이고, 서로 인사를 나누며 언제나처럼 자기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예수님 말고는 아마도 누구 하나 가룟 유다를 향해 별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22). 그저 어느 때처럼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였을 테니까.

   

 

첫 번 성찬식

 

저녁 먹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20a). 이로 보건데 떡과 잔은 유월절 먹기를 마치고서 특별한 의식 안에서 집전되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즉 첫 번 성찬식은 유월절 식사와 함께 시작되고(배병, 19), 또 식사를 마친 후까지 이어졌다(배잔, 20). 어찌 보면 이런 식사 자리는 수 없이 있었을 것이고, 또 유월절 역시 벌써 몇 차례나 지냈던 터라 그 밤의 의식들은 그리 생경하지 않은, 때문에 특별하다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그런 자리였다. 오히려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공개하신 말씀을 들은 후 배반자가 누구일까에 더 있었던 게 사실이다(23).

그러니 떡을 주시며, 잔을 돌리시며 이 떡과 잔의 새로운(신학적) 의미들을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을 저들이 다 이해하고 믿고, 또 그 의미를 바라보았을 것 같지 않다. 이미 이것을 성찬식이라 하여 이 예식에 익숙한 우리들로서는 어렴풋하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이 자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며, 잠시 후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주님이 왜 그토록 강하게 내가 원하고 원하였노라.”(15) 하시며, 또 반복적으로 유월절과 포도주를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6,18) 하시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주님이 주시는 떡과 잔을 수 없이 먹고 마시지만, 또 이미 마셨지만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바로 그때 주께서 이 떡과 잔을 통해 주시고자 하신 메시지를 그 떡과 잔을 통해 발견하며 보고 있지 못하다면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떡과 잔으로서의 몸과 피를 십자가에서 다 주시는 일은 이 만찬이 있고도 얼마의 날들이 지난 후다.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먹고 자고 쉬며 동거동락(同居同樂)하던 바로 그분이 메시야(유월절 어린양)가 되어 지금 자신들 앞에 차려진 유월절 양처럼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러고도 훨씬 후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여러 묵상은, 그렇다면 지금 이처럼 놀라운 의미와 가치가 진행 중인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주님과 제자들은 서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다는 것을 좀 더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주님대로(14-20), 가룟 유다는 유다대로(21-23),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다른 열 한 제자들도(24), 그야말로 한 지붕 세 가족이다. 바로 유월절 밤에 말이다.

   

 

부스러기 묵상

 

다시 주님을 묵상하며 생각한다.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셨을까. 당신의 몸을 떼어 줄 것을, 당신의 피를 다 붓는 것에 대한 새 언약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떡과 잔을 바라다본다. 이제 곧 임할 당신의 온 몸과 모든 피를 다 주시는 일, 이 일이 유월절 만찬에서 좀 더 분명한 그림(실재)으로 보여지고 있음에도 제자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번 역시 담담하게 말씀하시며,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신다. 자신을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21)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말이다.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사명의 자리에 흔들림 없으셨던 주님처럼 우리들 역시 우리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고 싶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22a) 때로 유다와 같은 자들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아는 자들이라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주님이 받으셨던 것과 같은 대접을 받을지라도 말이다.

첫 번 성찬식 앞에 서 계셨던 주님을 생각한다. 불과 얼마 후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역에서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게 사도행전이다. 저들 역시 가룟 유다처럼 목숨을 노리는 자들 앞에 잠잠했으며, 자신들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자들 앞에 서야만 했다. 그때 제자들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첫 번 성찬식에서 보여주신 주님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떡이 되고 피가 되어, 말하자면 성찬이 살아있는 복음이 되어 자신들 안에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바로 그날이 언젠가 저들 제자들에게도 있으리라는 전적인 신뢰와 소망이 있으셨기에 고독하고 몸서리치는 외로움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셨던 주님이 아니셨을까. 동일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느낀다. 알듯 모를 듯 한 미소에서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b) 약속하시는, 그러기에 돌이킨 후에”(32)까지를 향하실 수 있으셨던 자비의 눈빛을 본다.

이게 희망이다. 비록 첫 번 성찬식은 주님의 의도만큼 이해하지도, 일치시키지도 못했지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19b) 하시며 훗날을 기약해 주신 주님이 계시기에 말이다. 가룟 유다와 눈이 마주쳐도 상관없다. 떡을 떼어 주시며, 잔을 주실 때 주님의 손과 나의 손이 슬쩍 스치먀 주님을 대면할 때 나를 바라보시며 성찬으로 임재하신 주님을 느낀다. 아직은 곧 불어 닥칠 폭풍우를 예감치 못하고 천진난만하게 떡과 잔을 받아먹고 마시는 우리, 희망 없다. 하지만 언젠가 이 떡과 잔 앞에 그렇게 부끄럽지만은 않을 그날에 서게 될 우리, 희망이다. 첫 번 성찬식, 이게 주님과의 최후의 만찬이 되어버렸지만 아직은 희망이다. 앞으로 기념해야 할, 그래서 회복해야 할 바로 그 성찬식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늘 성찬이 바로 그 날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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