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vs 우리(눅 22.1-13)

20210326(묵상)

 

 

 

유다 vs 우리

Luke. 22.1-13

 

    본문 관찰

 

    음모와 배반(1-6)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유월절 식사 준비(7-13)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과의 동침

 

무엇인가 급박한 분위기인 것 같다.

여러 사람들이 움직인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야 늘 그랬지만(19.47-48), 놀랍게도 여기에 마침내 가룟 유다까지 합세하여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모의하기 시작한다(2,4,6). 주님의 예루살렘 때부터(19.28- ) 저들의 움직임은 심상찮았던 게 사실이다(19.39,48-49, 20.2,19-22,26,27-33). 이런 상황임에도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에 추호도 흩트림 없이 감당하신다.

하지만 저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결국 말씀과 전혀 반대되는 행동을 준비한다. 결과적으로 1928-21.38절에 진행된 주님의 말씀(가르침, 설교) 사역에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못한 셈이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19.37-38,47-48, 21.37-38). 이처럼 주의 말씀(메시야 사역)하심 앞에 있는 청중들 역시 두 종류로 나뉜다. 하지만 더 놀랍고 충격적인 것은 제자들 가운데 한 제자가 마침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공범(‘한 편’)이 되어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점이다.

   

 

음모와 배반(1-6)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3)

    “그들이 기뻐하여 ”(5a)

 

가룟 유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음모와 배반의 중심에 서는 일을 주도하는 한 사람으로 추락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3년이라는 공생애 기간을 주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동거동락(同居同樂)하며 주의 모든 말씀과 기적을 듣고 보고 체험했던 그였다(6.12-16, 9.1-6). 그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는 다르다. 그는 주님의 제자다. 그런 그가 어떻게? ? 무엇 때문에?

물리적으로는 전혀 융합될 수 없는, 그것도 메시야를 죽이려는 음모꾸미기에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주님의 제자가 한 길을 간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하나 힌트가 있다면 누가가 놓치지 않고 기록한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3)라는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세력의 움직임이다(6.16 참조).

왜 하필이면 제자중 하나가 사탄의 도구가 되는지는 지루한 토론일 수 있기에 일단 접기로 하고, 어떻든 최소한의 정보에 의하면 유다는 이 일에 자원함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책에선가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내리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뭐 이와 비슷한 글을 읽은 게 생각난다.

유다는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유월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번에는 다름 아닌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다. 이런 유혹이 밀려와도 이를 막을 수 있었음에도 유다는 이 일에 직접적으로 가담한다: ‘이에 가서’(4) 의논하매’(4) 언약하는지라’(5) 허락하고’(6) 기회를 찾더라’(6) 이 거대한 음모의 파도가 점점 강화되고 있는 것이 몹시 씁쓸하기만 하다.

이렇듯 대제사장들과 가룟 유다의 비극적인 만남, 그 안에 사탄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다의 이러한 일련의 언행 그 배후에는 사탄이 역사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사탄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 주님을 직접 공격하더니(4.1-13), 3-4년이 지난 지금은 그의 제자 중 하나를 넘어뜨리고 있다.

이 음모는 저희(대제사장과 가룟 유다) 모두에게 기쁨을 주었다(5).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향해서는 두려움으로(1), 주님을 죽이는 일에는 기쁨으로(5), 또한 여기에는 무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검은 의 거래가 있었다는 점이 놀랍다(5). 한편 요한복음은 결과적으로 유다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추락하게 되는가를 말하는 여러 곳에서(6.64,70-71, 12.4,6, 13.10-11,18,21, 13.2,27), -이는 사탄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면 정말 쉽게 끝나는 주제다.- ‘을 사랑하는 자였다는 앵글을 놓치지 않는다. , 그는 물신(物神)에 눈이 어두워졌고, 사탄은 이를 미끼로 삼아 그를 넘어뜨린다.

악인(1)과 악인(2)이 만나는 중계인은 사탄이었다. 이것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기쁨이었다니 실로 암담하다. 백성들에게 거둔 성전세를 맡은 종들이 성전의 주인을 죽이려는 일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들을 사용하는 것은 앞서 주께서 하신 포도원 농부의 비유(20.9-19)가 성취되고 있음을 -저들이 이 일을 알고 있었다(19)- 본다.

   

 

유월절 식사 준비(7-13)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13)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5.7b)

 

이런 와중임에도 주님은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도록 말씀하신다. 바로 이 시간에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이 바로 그 시간에 유월절 어린양처럼 주어야 할 자신을 생각하시며, 그런 의미에서 극적인 유월절 만찬을 구상하신다. 참으로 묘한 느낌이다.

유다의 준비(6)와 제자들의 예비(13)가 극명하게 대조된다. 두 이야기가 다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 배에서 나온 자식도 다르다지만 한 주님 안에서 제자훈련을 받은 자들이 이처럼 다를 수 있을까. 이런 폭풍우 전야에도 주님의 초점은 한결같이 우리공동체(주님과 제자들)에게 맞추어진다: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8)

마침내 두 마리의 양이 준비된다. 하나는 가룟 유다가 준비하는 죽임 당하실 어린양이신 주님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유월절 만찬을 위해 준비되는 어린양이다. 아니, 어쩌면 이 두 양은 모두가 다 예수님 자신인지도 모른다. 주님은 이처럼 유월절 양으로 준비되고 계신다. 이 길을 훤히 내다보시는 주님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10-12).

   

 

부스러기 묵상

 

유월절 스펙트럼이 묘하게 그려진다.

한쪽에서는 음모와 배반이(1-6), 다른 한쪽에서는 유월절 준비가 한창이다(7-13). 같은 하늘에서 전혀 다른 일들이 진행된다. 어찌 보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일들을 맡은 자들이 아닌가. 무엇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렇다. 저들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섬기는 자들이다. 백성들의 죄를 보면서 울어야 하고, 자신들 역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로서의 죄인됨을 인하여 떨어야 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일에 헌신해야만 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비록 자신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유월절 양이지만, 그러나 저들은 결코 유월절이 주는 그 풍성하고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치밀한 계획을 따라 준비했건만 이 잔치의 주인공이 아닌, 비록 잔치를 배설하기는 하지만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 주어지는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공동체역시 은밀하고 치밀하게 유월절 만찬을 준비한다. 그러나 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주께로부터 받은바 그 하신 말씀대로!”(13)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의기투합(意氣投合)한 사단의 졸개들과는 다르다. 가르침 받음과 삶 드림이 형편없이 일그러져버린 음모와 배반의 모리배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나는 어디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그리고 무엇에 기초하여 준비하고 있는지 . 나의 예비하는 곳은 다락방이기를, 제자들과 집주인과 함께이기를, 유월절 만찬을 예비하기를, 이 모든 것을 주께서 분부하신 그 하신 말씀대로!”(13)이기를 소망한다. 나도 다락방에서 주님이 주빈이 되실 바로 그 유월절을 예비하고 있는 자들 안에서 땀 흘리고 싶다. 유다를 향해 돌 든 손을 내리고, 유월절 만찬장으로 항하고 싶다. 주님 계신 곳으로, 주님과 더불어 주어진 시간을 보내고 싶다.

  

   

제목 날짜
06 떡 시험지, 말씀 답안지(마 4.1-11) 2021.10.10
05 세례 요한: 광야에 서다(마 3.1-17). 2021.10.03
04 말씀을 이루는 삶, 성도의 소명이다(마 2.13-23). 2021.09.27
03 예수, 그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마 2.1-12) 2021.09.27
02 마침내 임마누엘이다(마 1.18-25). 2021.09.27
01 예수님은 누구신가?(마 1.1-17) 2021.09.27
마태복음 맥잡기 2021.09.27
40日 부활행전.復活行傳(눅 24.36-53) 2021.03.27
엠마오 페스티발(눅 24.13-35) 2021.03.27
첫 번 부활절(눅 24.1-12) 2021.03.27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눅 23.44-56) 2021.03.26
십자가를 보라!(눅 23.26-43) 2021.03.26
그들은 누구?(눅 23.1-25) 2021.03.26
너는 누구?(눅 22.63-71) 2021.03.23
나는 누구?(눅 22.47-62) 2021.03.22
기도가 맥(脈)이다!(눅 22.39-46) 2021.03.22
선(先) 섬김이다!(눅 22.24-38) 2021.03.22
최후의 만찬(눅 22.14-23) 2021.03.22
유다 vs 우리(눅 22.1-13) 2021.03.22
재림의 법칙(눅 21.25-38) 2021.03.19